오늘의 스케치 마음밑돌 대표 신은경
언젠가 A에게 말했다. 왠지 나는 이번 생을 한 번 살아본 거 같아. 가 보지도 않은 길인데 이미 가 본 거 같은 기시감이 느껴져. 그런데 문득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 같은 식당에 같은 사람과 같은 메뉴를 먹더라도 매 순간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는 것. 그 이야기의 새로움이 삶의 희망 같은 건지도 몰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삶은 자신을 쓸모없이 깎아내려 그 부분을 메우려고 절망적인 노력을 하거나 자신에 대해 과도한 이상적 기준을 설정해 놓고 전전긍긍해하지 않는다.
성장을 위한 용기를 얻기 위해서는 원점으로 후퇴하려는 퇴행을 존중해야 한다. 성장에 대한 두려움, 병리적 특성 또한 깊이 인정할 때 내적인 성장은 비로소 조금씩 시작된다. 단순한 언어를 습득한 아이는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적절한 환경에 있을 경우 새로운 단어로 이루어진 더 복잡한 문장으로 나아가려는 소망을 자발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성장하고->퇴행하고->성장하고->퇴행하는 지점을 충분히 허용해 준다면 사과나무가 어떠한 투쟁 없이 그저 자신의 내적 본성으로서 사과를 맺게 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기분이 밝을 땐 큰 것도 작게, 부드럽게 해볼 만하게 기분이 어두울 땐 작은 것도 크게, 두렵게 혹시나 어둠 속에서 못 보고 넘어지지 말라고 아주 크게
우리가 때로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이 지니고 있는 정신병리임에도 이것이 너무나 조용하게 내면에 널리 퍼져 있어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실존주의자들은 공포, 번민, 절망을 되풀이하며 이것에 완강하게 맞서는 것만이 삶의 긍정의지라 강조한다. 그러나 사람은 슬픔과 기쁨을 다양한 비율로 경험한다. 삶을 하나의 색으로 전제하는 순간 생기를 잃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목적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그냥 떠나고 싶은 것. 그리하여 엉뚱한 곳에 당도하는 귀여움. 이러한 행보는 때로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비극 안에 또 숨겨진 길이 있어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묘미도 있다. 흣.
사르트르를 비롯해 몇몇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오로지 스스로가 자기(self)를 만든다고 전제하여 "하나의 프로젝트로서의 자기"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이는 마치 특정 개인이 자신이 되고자 결심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유전과 사회, 환경적인 숙명 속에 놓인 이에게 과도한 책임감과 절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반면 로저스 학피 및 프로이트 학파에서는 자신을 형성하는 의지와 의사 결정 방식을 경시함으로써 주어진 숙명 속에서도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정신력과 용기를 회피해왔다. 조건 지어져 있지만, 그 조건의 그물망 속에서 용기를 발휘하는 것은 그 자신의 존재 의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감정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 그 감정이 나를 표현하고 보호해 주기 위해 온 것도 모르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성격적 특성도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론 이런 긍정적 특성이 다른 범주에서는 한계와 제약이 될 수도 있다. 부정적 성격 특성도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영역에 있어서는 기막힌 재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우리는 무의식적 대상에게 인정받기 위해 평생을 애쓴다. 그러한 대상의 실체가 비어 있을지라도 그 대상을 향해 꿈속에서도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지금 잘 모르는 건 모르는 채 내버려 두자. 시간이 지나면 화선지 너머로 탁본이 드러나듯이 그것에 대한 어떤 길이 보일 테니까.
진정한 파워는 자기 수용에서 나오고 자기 수용은 자기 긍정의지에서 나온다. 긍정의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창조적 자기 표현의지를 가질 때 삶은 생기를 되찾는다.
공간에 대한 추억은 제각각이어서 물리적 공간은 같아도 심리적 영토는 다르다. 나에게 놀이공원은 탐구생활 표지 같은 곳. P에게는 어릴 때 살아있던 엄마랑 갔던 그리운 곳. L에게는 수학여행 때 지갑을 잃어버린 곳. k에게는 첫사랑과 나눠먹던 츄러스가 있는 곳. Y에게는 아르바이트의 눈물이 있는 곳.
회복과 성장은 단점이나 손상된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닌 잠재되어 있는 좋은 것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너는 음악으로 그림을 그려. 아주 작은 색깔도 절묘한 지점에서 휘날리고 있어. 허공은 비어 있는 캔버스 총천역색 붓들이 여러 색으로 휘날리고 있어. 아 암만해도 넌 뛰어난 화가야.
사람들은 불확실을 견딜 수 없어서 수학을 만든 게 아닐까? 예를 들어 원주율은 3.141592265358979..... 무한대로 불확실해.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파이라고 규정했다. 아무리 파이라는 매끈한 기호에 다아도 그걸 완벽하고 확실하게 안다는 거 모순이다.
누구나 다 자기 자리에선 힘들지 않을까? 매끈하게 보이는 팔다리 속에 혈관이 얽혀서 흐르고 있는 것처럼. 네가 네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잡아 조금씨 수면 위로 올리길 바래. 스스로에게 사랑을 담아.
그는 자신이 별로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이라서 내가 이제 싫증이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자신의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충동은 나를 놀라게 할지도 모르므로 자신을 통제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나는 나 자신에게 싫증이 났다. 그리고 나의 파괴적인 충동이 두렵다."라고 말하게 했더나 그는 진지하게 생각한 후에 자신의 투사를 깨달았다.
잠깐 머무는 곳에서는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 줄 수 있다. 잠깐 머물 테니까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면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도 있다.
내 마음은 골짜기 깊어 그늘져 어두운 골짜기마다 새들과 짐승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들어오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