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스케치 마음밑돌 대표 신은경
성장에 대한 시도는 우리에게 불안을 가져다 준다. 이제까지 피하고 억압했던 욕구들과 직면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불안을 방어해 주던 합리적 계획들을 포기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를 내맡기는 '모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을 땐 살짝 손등을 꼬집어보자. 차가운 물컵을 쥐어보자. 몸이 감각하면, 생각은 사라진다. 감각과 생각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니까.
무언가 그것과 사투를 벌일수록 그것에게 빨려들어간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앉으면 숨 쉴 공간이 생겨 상황이 자연스럽게 보여.
정신분석학자들은 방어를 단순히 개인의 억압된 이드(id) 충동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방어란 자기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슥슥 스케이팅을 하다가 몇 가닥 꼬인 심리적 매듭을 발견할 땐 고 녀석이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는구나. 요게 아이젠 구실을 하네. 더 겸손하고 강하게 만드네 이 지상에서 그리 여겨보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삶은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개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그때, 그때 생생하게 존재히고 표현하여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슬픔은 잘 닦인 창 같아서 이쪽 얼굴이 비춰질 때마다 가만히 놀라. 슬픔은 너를 정화시켜 온 어떤 힘 같아.
자신의 유한성(finiteness)을 받아들이는 용기란 자신이 제한되고 못남을 알지라도 즉 최종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되, 경우에 따라서 틀린 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행동하고 사랑하고 사유하고 창조하려 하는 용기인 것이다. 자신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보다 더 멋진 저곳의 비밀은 여기에서 하던 것을 저기에 가면 더 잘하는 데 있지 않다. 그저 달아날 수 있는 가능성만으로도 설레게 하니까.
늘상 반복되는 결말. 하지만 알아차리고 있다면 아주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 이렇게 조금씩 차이나기 시작하면 훌쩍 달라져서 놀라게 될지도 몰라.
즐거움과 기쁨만 아니라, 슬픔과 고통도 삶의 중요한 체험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지만 때로는 못마땅해하며 불행감을 맛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진지함도 소중하지만 장난기 어린 유치함도 필요하다. 혼란스러움에 몸을 내맡기고서 새로운 자각이 들 때까지 한동안 그 상태에 머물러 보는 체험도 중요하다.
뭘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 다만 너로부터 따뜻한 반응을 돌려받았다는 것. 그만으로 충분해.
우리는 자기 안에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이 무너지면 '나'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버리고 싶어 하면서. 상대에게 실망하는 것은 '그'라는 사람 속에 있는 어떤 부분만을 선택해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면 부분으로 기능하고 부분으로 교류하다가 어느 날 그 부분이 무너지면 온 존재는 사라지겠지. 설사 평생을 함께 했더라도.
이쪽으로 가기 전에 저쪽을 돌아보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두 마음. 충분히 저쪽을 바라본 뒤에야 비로소 이쪽으로 갈 수 있다.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지만 심리적 난쟁이로는 살지 말자.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외부가 아니라 스스로를 믿어 주고 사랑해 주는 힘이니까.
완결이란 어떤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그것을 일단락 짓는다는 의미다.
네가 던진 그것은 정수리에 검은 새처럼 붙어 있지만, 한 대의 기타처럼 튜닝하자. 우주 에너지로 몸을 씻자.
나는 그에게 돌의 긍정적 이미지를 말해 보라고 했다. 그는 "묵직하고, 안정되어 있고, 유용하며, 아름답고, 신기하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방금 말한 형용사 앞에 '나는'이라는 주어를 붙이게 했다. 그는 마침내 자신에게도 그러한 속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매우 기뻐했다. 우리가 타인의 장점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 속에도 그러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처럼 늘 움직이고 있는데 설계도에 맞춰 지어야 할 집처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