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몽구스라는 밴드를 인터뷰했을 때, 리더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아주 작은 소리까지 채집하는 촉이 있는데, 어떤 특정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 대한 빛깔이나 질감(?) 같은 게 느껴진다고요. 공감각이 발달한 셈이죠.
그래도 그 친구는 음악적으로 자신의 공감각을 발휘하며 살지만, 저는 소리에 대한 섬세한 스케치가 거슬릴 때도 있습니다. 하루는 영화관에 갔는데, 친구는 영화에 굉장히 몰입해 즐기는데 저는 옆 자리 앉은 분이 타닥, 타닥, 하고 발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매우 잘 들리는 거죠.
그럴 땐 특정 소리에 집중하지 않고, 여백의 확장성을 꾀해 봅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저 검은 점이 날 거슬리게 하는 소리라면, 그 검은 점을 밀어내거나 지워버리지 않으면서도 남은 여백을 넓혀 봅니다.
그러다 보면 저 검은 점은, 소실점으로 작아지는데, 이때 내가 떠올리면 기분 좋은 이미지도 곁들여 줍니다.
저는 '딸기쨈, 호박쨈, 포도쨈'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어떤 분은 하와이에서 산 팔찌를 염주 꿰듯이 돌리면 그곳으로 돌아간 듯한 풍경이 펼쳐져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키우는 고양이를 떠올리며 “고양이발바닥 고양이발바닥.” 하고 주문을 외면 마음이 진정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좋은 정서조절법이죠
아무튼 말이죠. 저 검은 점은, 날 불편하게 하는 무엇이든 대입 가능합니다. 영업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회복탄력성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불편한 고객을 저 검은 점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여백의 확장성을 꾀해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심리적 공간을 만드는 파트를 꼭 집어넣는 것도 그 이유에서입니다.
이런 심리적 공간을 확보하면, 갑갑한 상황에서도 영적 공간이 생기거든요.
사람이 사는 기쁨을 보면, 칙칙한 하루 속에서도 작은 것에 웃을 수 있는 여유에서 나옵니다.
이런 마음쿠션적인 지대가 있어야 유아기적인 퇴보도, 성장 욕구도 동시에 존중할 수 있거든요.
저번에 유아기적인 퇴보와 성장 욕구 사이에 리듬감을 만들어 주는 게 □□□과 □□□□□이라고 했는데요.
저는 이 리듬감의 탄력을 만드는 게 자율성과 자기연결감에 있다고 봅니다. 자유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라면, 자율성은 어떤 원칙과 시스템을 갖고 있으면서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본인이 하고자 하는 주체성을 갖고 있는 거죠. 유아기적인 퇴행을 넘어서는 임계점엔 ‘자율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자율성도 그래요. 거대자기의 숨막힘(완벽해야 해)에서 벗어나서, 작은 것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내가 도전 가능한 것부터 계속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나아갈 때(단번에 되는 건 없다), 빛을 발한다는 거죠.
무엇보다 유아기적인 퇴행의 기저를 보면 고착화된 하나의 방식만 존재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본인만의 특정한 길이 있는데, 그 길에서 벗어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상실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성장의 두려움을 감내하느니, 그냥 퇴보를 통해서라도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반면 자기연결감이 있으면, 유연성이 생깁니다. 심리적 뿌리가 튼튼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잘 될 것이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한 가지 길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방식을 통해 나아갈 수 있다는 맥락적 눈이 있습니다.
애착이론의 핵심도 자기연결감에 있습니다.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탐색할 수 있는 건 뒤에 엄마(궁극적으론 자기 연결감)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그래서 조금씩 나아갔다가, 안전지대로 후퇴하고, 다시 용기를 내어서 나아갔다가 다시 후퇴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마치 동심원을 그리듯이 점점 행동반경이 넓어지는 거죠. 하지만 그 구심점에는 언제든지 힘들면 달려갈 수 있는 자아의 중심(어릴 땐 엄마와) 연결된 Self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살면서 어려운 일을 겪어도, 넘어지고 꺾여도, 그 본질적 자리로 돌아와 다시 연결되면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자살률과의 상관관계를 보면 주원인으로 스트레스와 우울증 등 정신적 문제(36.2%)가 가장 컸고, 경제적 어려움(23.4%)과 신체질환(21.3%) 등으로 이어지는데요.
가만히 보면, 우리는 자기 안에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나’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버리고 싶어 하는 거죠.
하지만 자기연결감이 있으면, 내가 겪는 여러 어려움과 고통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쉽게 주눅 들지 않으면서도 여러 방식을 탐색하고 응용하는 힘이 생깁니다.
스캇펙은 ‘내가 겪어나가는 고통을, 나 자신과 기꺼이 함께 하려는 의지와 사랑’에서 그 모든 힘이 나온다고 봅니다.
저는 아래의 글에서 스캇펙이 말하는 부모를 나 자신, 혹은 리더, 구성원, 배우자나 친구로 변환해 읽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M. Scott Peck, 《아직도 가야 할 길》, p.28-36
최근에 한 경리 사원과 몇 개월간 상담을 했다. 그녀의 문제는 해야 할 일을 질질 끌고 미루는 성향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중략)
나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장 쉬운 일부터 분석해 보기로 했다.
“케이크를 좋아합니까?” 나는 물었다.
그녀는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케이크의 어떤 부분을 좋아합니까?” 계속해서 물었다.
“물론 프로스팅(설탕, 크림 등을 덮은 부분)을 좋아하죠.” 그녀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러면 케이크를 어떤 순서로 먹습니까?”
그녀는 곧 “프로스팅을 먼저 먹는 것을 말할 것도 없지요.”라고 대답했다.
케이크 먹는 습관부터 시작해서 나는 그녀의 일하는 습관도 검토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그녀는 언제나 처음에는 즐거운 일을 하다가 나머지 시간에 허덕이며 겨우 지겹고 하기 싫은 일을 겨우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한두 시간에 재미없는 일을 억지로라도 먼저 해치우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즐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녀도 스스로 공감하고 예전의 습관을 바꾸려고 했고, 그 결과 더 이상 일을 질질 끌지 않게 되었다. 이는 그녀가 근본적으로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룰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데 사랑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자신이 귀중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시간을 유용하게 쓰게 된다. 일을 미루던 경리 사원의 경우 그녀는 자기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시간을 귀하게 여겼더라면 자신의 하루를 그렇게 불쾌하고 비생산적으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그녀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소중하게 돌봐 주지 않고 방치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꼈고 자신을 잘 가꾸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훈련시킬 가치가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녀가 충분히 유능한데도 자기 훈련에 있어서는 부족한 이유는 자기 자신과 자기 시간을 존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녀가 자신의 시간을 귀중하다고 자각할 수 있게 되자, 자연스럽게 시간을 계획적으로 짜기를 원하게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을 최대한 유용하게 쓰게 되었다.
즐거운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을 계획적으로 짜되, 고통을 먼저 겪은 뒤 즐거움을 갖게 되면 그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기술을 우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배운다. 심지어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에게도 이런 기술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재미있는 놀이를 하면서 친구에게 먼저 하라고 하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자기 차례가 왔을 때 기다린 만큼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여섯 살쯤 되면 케이크를 먹을 때 맛없는 부분을 먼저 먹고 맛있는 부분을 나중에 먹을 줄도 안다. 초등학교에서는 즐거운 일을 뒤에 하는 습관을 조직적으로 훈련받게 되는데, 예를 들어 숙제하는 일 같은 것이다. 열두 살쯤 되면 부모가 말하지 않아도 숙제를 먼저 해치운 다음 텔레비전 앞에 앉을 줄 안다.
그러나 실제로 청소년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이 나이의 많은 청소년들이 그러한 행동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쉽고 편한 일을 제쳐 놓을 수 있는 역량을 잘 발달시킨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열대여섯 살이 되어도 그런 능력을 기르지 못해 문제 학생이 되고 만다.
보통 또는 그 이상의 지적 수준을 가졌는데도 성적이 나쁜 것은 충동성 때문이다. 수업 시간을 빼먹는다든지 결석한다든지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순간적 느낌에 따라 행동하는 아이들은 이다음에 커서 사회생활을 할 때도 충동적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 아이들은 싸움에 자주 끼어들기도 하고, 약물을 남용하는 등의 문제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에게 혹독하게 벌을 주는 훈육 방법은 무의미하다. 그 이유는 그 아이들 부모 자신이 그들의 자제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인하여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모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하루하루 참을성 없고 자제력 없이 사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되면 아이들 역시 “저런 것이 삶의 길인가 보다.” 하고 마음속 깊이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 역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아무리 무질서하고 혼란한 가정일지라도 그 속에 사랑이 있으면 자제력 있는 아이들이 나오기도 한다. 부모가 높은 학력 수준과 경제적 수준을 갖추어도 사랑이 부족한 경우에는 아이들은 버릇없고 파괴적인 문제아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사랑이 전부다.
사랑이 넘치는 훈육방식은 사랑이 없는 훈육 방식보다 질적으로 월등히 낫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넘쳐나는 사랑으로 틈틈이 아이들을 관찰하여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 볼 때, 부모는 진정으로 아이들과 함께 고민하며 괴로움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이 이런 것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당장에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속 깊이 부모가 얼마나 함께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지 느끼고 배우게 된다.
그들은 “우리 부모가 기꺼이 나와 함께 고통을 함께해 준다면 고통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고 나도 기꺼이 그 고통을 견뎌 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훈련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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