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과 내적통합성] 경계선 성격에 대해

 

입춘이 지나고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신축년, 신축월을 지나면서 살아 있는 존재가 얼마나 우주적 흐름과 연결되어 있는지 여실히 깨닫게 되었는데요.

 

신축년은 제 인생에 있어 얼음길을 걷는 시기여서 부러 칩거하며 글만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괴로운 일이 찾아와 법적인 대처와 여러 변수에 대해 고심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이 글을 보내 주었습니다. ☞ 운을 읽는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

 

인터뷰를 하면서 여실히 느낀 지점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가는 분들, 주어진 삶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분들은 니시나카 쓰토무 선생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드는 생각이 과연 타인을 바꿀 수 있을까? 란 물음이었습니다. 내담자 분들의 주요 이슈를 보면 “자식이 뜻대로 안 되고, 가족이 뜻대로 안 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뜻대로 안 되고, 내 자신이 뜻대로 안 되고…”

 

나와 타인을 바꿀 수 없다는 게 주요 이슈인데요.

 

사실 인간관계의 고통은 타인을 내가 바꿀 수 있다는 자기 교만에서 시작된다고 봐요.

 

타인의 의견과 생각, 느낌에 대한 권리는 바로 그들에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개별적 소우주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죠.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도 다릅니다. 다들 자신만의 등불을 들고 걸어가고 있는 거죠. 무엇보다 그 사람의 신발을 직접 신어보기 전에는 함부로 단언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말이죠.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가 된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숙과 미성숙의 경계가 바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이 책임감을 가진 나와 그렇지 못한 나로 인격이 분열되어 있는 게 경계선 성격(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입니다.

 

 

경계성 성격은 타인에게도 피해를 주지만, 분열된 인격이 자신을 공격해 스스로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경계선 성격 원인을 보면 주양육자가 이랬다 저랬다, 원칙 없이 대했거나, 믿었던 사람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며 상처를 주었거나, 유기되거나 학대 당한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혹은 청소년기나 성인기 초반에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을 때 유발됩니다.

 

그때 받은 정서적, 신체적 학대는 자신의 경계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유발합니다. 특히 타자에 의해 신체적, 성적으로 공격 받은 아이는 타자의 침범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 혼란을 느낍니다.

 

상처 받은 경계인이 힘을 갖게 되면 피학적인 지점이 가학적으로 변합니다. 그때는 내가 당했지만, 이제는 절대 당하지 않아. 날 만만하게 보지 마. 세상은 백퍼센트 적 아니면 백퍼센트 친구. 이런 이분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경계인들이 주로 쓰는 방어기제는 자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컨트롤하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한다는 점입니다. 줄에 꿰인 인형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일희일비하는 전능감을 즐기지만, 내면은 공허하고 슬픈 사람들입니다. 자아정체감(내적 통합성)이 없어 분열되어 있습니다. 자신도 어떤 모습의 내가 진짜 나인지 헷갈려 합니다.

 

메리벨 피셔 박사 말에 따르면 유전적 소인도 있지만, 당사자가 겪은 정서적, 신체적, 성적 학대를 75% 이상 보고하고 있는 만큼, 내가 그때 감당하기 힘들었던 사건, 그 심리적 매듭을 풀어야 치유 가능합니다. 이 지점을 무의식적인 측면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내면의 분열성이 통합됩니다.

 

 

상황이 악화될 때 나타나는 주 증상으로는, 반복적인 자해 행동, 상대를 과대 이상화하거나 반대로 극도로 평가 절하하는 경향, 유기에 대한 공포, 강렬한 수치심과 공허함, 극단적인 감정, 반복되는 해리감, 섭식장애를 앓거나 무분별한 성관계, 약물에 중독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심리적 고통을 느끼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감정을 피하기 위해(이러한 충동적 행동이 심리적 안전지대가 되기 때문에) 다시 충동적인 행동으로 되돌아갑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에 그냥 방치하면 극단적 시도를 할 확률이 높습니다.

 

혼자 힘으로 치유하기 힘듭니다. 물론 약물치료도 도움이 되지만, 단순히 병리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상담보다는 무의식 깊이 내려가 피 흘리고 있는 분열된 그때의 나를 만나 치유하는 상담이 필요합니다.

알파정신분석연구소 ☞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본 경계선 성격

 

처음에 교과서적인 지식밖에 없는 상태로 경계선 성격 내담자를 만났을 때, 이 친구가 샘을 만나 행복하다며 손수 뜨개질한 목도리를 선물했을 때 기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해리적 상상 속에는 자길 우습게 보고 본인이 떠 준 목도리를 난도질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멀쩡히 목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계선 성격 같은 경우 자신의 기분에 따라 상대가 천사가 되었다가 악마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보기 힘들어합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바라봅니다. 기분이 좋을 땐 내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여겨지다가, 우울해지면 쓰레기처럼 여겨지는 거죠.

 

그래서 어떤 중간 지점의 자아정체감(내적 통합성)이 없습니다. 기분이 자주 널뛰기 때문에 이러한 기분을 통제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자해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 올라오면, 세상 사람들 모두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높죠.

 

사람들은 나를 _______ 라고 생각한다. / 당신은 나를 ______ 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여기지만, 사실 그의 무의식은

 

---> 나는 나를 _______ 라고 생각한다.

 

이런 투사적 내적 구조를 갖고 있는 경향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런 적개심을 살펴보면 단순한 피해의식이 아닌, 분명히 피해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내적 구조를 보면 기분이 양극단(A와 B)을 왔다 갔다 해서 역설적 지점(C)을 감내할 만한 완충 지대(푸른 지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면이 분열되어 있죠. 이러한 정서적 완충 지대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불신하면서도 모순적이게도 끊임없이 사랑받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피해 경험이 있던 나를 충분히 만나 치유해야 합니다. 트라우마로 인해 표면에 스크래치가 나도, 본원적인 나는 스스로의 뿌리를 충분히 받히고 있다는 내적 통합감이 필요합니다.

 

내적 통합성을 갖기 위해서는 양극단의 인격들을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Self(참나)와 만나야 합니다. 분열되어 있는 인격들을 통합하는 힘이 내 안에 충분히 내재되어 있으며, 설사 이지러지고 찌그러진 지점이 있어도 그런 나를 보살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내적 통합 구조를 만들어가는 상담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잘하려고 하다가 신경증적 노이로제에 걸린다고 봐요.

 

하지만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스스로를 건강하게 돌볼 힘도 자신의 내면에서 출발합니다. 타인이 대신 짊어져 주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를 아끼고 격려하며 자신의 두 발로 걸어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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