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막차를 타고 오는데,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더라고요. 아마도 그분들 중의 하나가 저인 적도 많았을 겁니다.
저도 딱히 할 일이 없을 땐 무의식 중에 휴대폰을 들여다보는데요. 물론 유용한 정보나 소통을 위해 사용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지금 이 순간, 당면한 공백이 버거워서 SNS로 흘러들어간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바이서(Beisser)는 요즘 현대인들은 ‘공백’을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한다고 말하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은 공백 상태를 피하기 위해 계속 잡담을 하거나,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과도한 흡연을 하거나 끊임없이 어떤 외적인 행동으로 달아나길 원한다고요.
사실 사람은 면 대 면으로 직접 만났을 때 뇌에서 옥신토신이 분비되어 안정감이 생깁니다. 물론 직접 만나면 외려 피곤해지거나 때에 따라 맘 상하는 일도 생기지만, 인터넷을 통한 연결성은 좋아요,와 댓글로 도파민을 분비할 뿐, 더 큰 공백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도파민의 특성상 흥분을 유발해 당장은 기분이 좋지만, 또 쉽게 사그라드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더 큰 공백감을 느낄수록 다시 접속하는 중독성을 보이는 게 문제입니다. 가상 속 세계와의 만남은 나에게 연결감을 주는 듯하면서도 작은 구덩이 하나를 파 놓고 사라지는 기분이랄까요.
그래서 전문가들은 SNS를 하는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에만 접속하게 해야 한다, 내지는 휴대전화를 꺼 놓고 Off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권하는데요.
어떤 것에 중독되기 전에 그 조건이 형성되지 않게끔 스스로를 배려하는 건 좋은 방법이라고 봐요. 그런데 저는 근본적인 대처법은 아니라고 봐집니다.
장자는 마음 치유의 활로를 ‘좌망(坐忘)’으로 보았는데요. 마음의 치료란 것이 ‘인위적인 노력’으로는 ‘부분적 치유만 가능’하다는 거죠. 근본적인 대처는 ‘본래 스스로 그러함’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는데요.
장자가 말하길, 하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뭇 생명들이 호흡을 원활히 하도록 구멍을 뚫어주고 있는데, 인간만이 스스로 자기 구멍을 틀어막고 있다. 공백을 직면해 통과할 줄 알아야 한다, 고 말합니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치유의 태도였는데요.
펄스(Perls) 역시 중독성에 대해, 밀려들어오는 공백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직면해 머물러 있지’ 못하기 때문으로 봅니다.
공백을 직면하고 거기에 머무르면 나머지는 유기체가 스스로 알아서 치유한다는 거죠(Hansen et al., 1977).
게슈탈트 치료에서는 지루할 때, 피하지 않고 잘 직면하면 나중에는 아주 흥미롭고 새로운 감정으로 바뀌게 된다고 말하는데요.
제가 요즘 훈련하고 있는 게, 혼란스럽거나 지루하거나, 텅 빈 덧없음이 밀려들 때, 가만히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보는 겁니다. 처음엔 얼마나 찜찜한지, 막 뭔가로 전환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만히 직면하여 통과하다 보면 뭔가 말갛게 새로운 지점이 열리는데요.
이 비밀의 원리는요. 우리 뇌는 지루함을 느낄 때 외부에서 자극거리를 찾지 못하면, 자극을 찾아서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참자기(true self)와 만나면서 활동성을 띄게 된다는 거죠(Zomorodi, M, 2017).
이러한 뇌의 ‘공회전’ 속에서 묵혀 두었던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로 이어져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로 짠,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심심할 때 뇌가 똑똑해진다는 게 이런 맥락인 겁니다.
그래서 영화 한 편 제대로 못 보게 만드는 SNS 확인 충동이 밀려온다면, 그러한 충동을 용감하게 직면해, 가만히 거기에 머무르는 연습을 해 보는 거죠. 이때 몸에 힘을 빼고, 이완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펄스는 불안을 잘 느끼거나, 신경증이 있는 내담자는 ‘이완된 상태를 싫어한다.’라고 하는데요. 즉 불안과 긴장 상태가 이미 이들에게는 습관화되어 있어, 그러한 상태에 자신이 있으면 마치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착각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완된 상태(방어하지 않는 상태)에 있으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하는데, 실제로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뿐더러, 차츰 그것이 기분 좋은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긴장과 방어를 해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뇌는 살짝 이완되었을 때 예리해지고, 더 전방위적인 시야를 갖게 된다는 게 뇌과학자들의 중론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의 텅 빈 공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알아차리면, 끝없이 설명하고 해석하는 행동을 멈추게 되어 자신의 실존과 접촉할 수 있다는 거죠.
예전에 자동차 만드는 분을 인터뷰했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자동차 핸들이랑 본체 사이에는 핸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마련된 유격이라는 여유 공간이 있는데... 이 여유 공간이 없으면 핸들이 뻑뻑해서 원활하게 운전할 수 없을뿐더러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고요. 그래서 견고하게 만들고 싶을수록 여유 공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말이 좋아서 취재 수첩에 적어 두었었는데요. 사실 고심 끝에 악수를 둔다고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도 그 문제에 관련된 정보를 찾아두는 건 좋지만, 진짜 해결은 그러한 프레임에서 벗어났을 때(여유 공간이 있을 때)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창의적인 분들이 주로 공백 상태에서 많은 아이디어가 흘러나온다고 말하는데요. 예를 들어 샤워할 때, 멍 때릴 때, 잠깐 상상 속에 잠길 때... 등 살짝 이완되어 그 문제로부터 떨어진 공백 상태에서 뭔가가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쇼스타코비치도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와인을 마시다 중간중간 사라지곤 했다죠. 피아노 앞에 앉지 않을 때 외려 구상이 떠올라서 그때마다 사라져서 악보로 옮겼다네요. 많은 예술가들이 이처럼 다른 일을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뇌가 ‘공회전’ 상태일 때 영감을 얻곤 한 사례는 많습니다. 이마저도 귀찮을 땐 잠이라도 맘 편히 자는 거죠. 뇌는 수면 중에도 여러 기억을 엮고 묶어서, 부지런히 문제의 해결능력을 높여주는 기특한 일을 하니까요.
암튼 말이죠. (클릭☞ :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의 비밀)에 대해 죽 이어서 쓰고 싶었는데, 공백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네요. 앞으로도 그냥 제가 쓰고 싶은 주제로 마음껏 이어나갈까 해요 ;)
문득 건강하다는 개념도 어떤 측정 도구를 가지고 가늠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사람마다 건강하다의 기준이 다 다르듯이) 자아상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자아상을 갖는다는 것도, 그것 역시 개념에 근거한 프레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네요.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러고 보면, 제 석사 논문이 <개념화된 자기 해체>입니다. 읽고 싶은 분들은 (클릭☞ : 개념화된 자기 해체에 대한 문학상담적 접근 상단에 원문보기 클릭)
그리고 메일이나 방명록으로 저에게 상담을 의뢰하시거나 센터 추천을 원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희 대학원 상담센터도 괜찮아서 추천드리고 싶어요. (클릭☞http://sangdam.kcgu.ac.kr/) 개인상담이나 단행본 의뢰도 내년에 한 번 더 문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선생님 바꾸는 것에 대해 묻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상담은 궁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신 뜻대로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저도 3회기 오고 드롭된 내담자도 있고, 30회기 만난 내담자도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야외의 호젓한 까페이긴 한데, 으흠, 이 글을 쓰고 고개를 들어보니 아무도 없네요. 아 무서워라. 얼른 집에 가야지. 힘찬 한 주 시작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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