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동안 함께 했던 강아지를 저는 2019년 8월 17일에 잃었습니다. 십여 년 전,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이후 친구를 잃은 아픔이 있었지만, 여전히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살이 타 들어가는 아픔입니다.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고 쓴 《애도 일기》에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아픔에 대해 이렇게 토로합니다.
“모든 일들은 아주 빨리 다시 시작되었다. 원고들, 이런저런 문의들, 또 이런저런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차 없이 얻어내려 한다. 그녀가 죽자마자 세상은 나를 마비시킨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야, 라는 말로.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1977년 11월 6일)
작년에 내담자 K를 만났을 때 그러더라고요. “내 새끼는 죽어 버렸는데, 남겨진 나의 인생은 강물처럼 그렇게 무심히 흘러간다. 세상은 나의 속사정 따위는 상관없이 무심하게 흘러간다…….”
특히나 K처럼 사고로 자식을 잃는 급작스러운 죽음일 경우, 그 고통은 배로 커집니다.
그리고 예견된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 예견된 시간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작년에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건너편 중환자실에 있던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가을이 와도, 그냥 가을이 아니다. 내년 가을에는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분들은 개가 아픈 걸 가지고 유난을 떠냐고 했지만, 저는 2017년에 키우는 강아지가 신부전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마음 한 구석에 겹의 화면이 펼쳐졌습니다.
해피랑 같이 공원을 걸어도 겹의 화면 너머에는 “언젠가 너를 보내고, 나는 혼자 이 공원을 걷게 되겠지.”라고 우울해하거나, 지금 멀쩡하게 살아 있음에도 건강한 다른 강아지가 뛰노는 걸 보면 “나중에 너를 보내고, 다른 강아지를 보게 되면 너를 떠올릴 수밖에 없겠지.”라며 미리 아파하며 슬퍼했습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 순간부터 현실은 두 개의 겹으로 나뉘어, 네가 있는 세상과 앞으로 네가 없게 될 세상으로 동시에 휘돌아 나가는 거죠.
사람이든 동물이든 나와의 애착관계에 놓인 사랑하는 존재라면 그 존재가 상실되었을 때, 비슷한 심리적 아픔과 고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아픔이 아니더라도, 실직, 실연, 이별 등 상실의 아픔을 겪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애도의 단계에 대해 알아두시면, 혹시 그런 아픔이나 슬픔을 겪더라도 아, 내가 비정상이 아니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지점들을 성찰하게 됩니다. 만약에 제가 애도 상담을 공부해 두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슬픔의 늪에서 더 오래 헤매였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는 부분들, 그리고 겪은 심리적 변화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1.부정과 충격의 단계
처음 상실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하지만 이때 무의식은 우리를 보호하고자 약간의 마비 상태를 선물하는데요. 이는 부정과 회피로 이어집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혹시 잘못된 거 아냐?” “우리 OO이가 왜 죽어? 도대체 왜?”
또 어떤 분들은 담담하게 손님을 맞고 장례까지 차분하게 잘 치른 다음에 집으로 혼자 돌아갔을 때 공황 상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존 볼비(John Bowlby)는 이 시기를 사랑하는 존재가 떠났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는 시기로 보았는데요. 약간 멍한 상태로 그럴 리 없다는 부정과 회피로 이어집니다.
저 역시 해피의 죽음 앞에서 약간 마취된 듯한 멍한 통증과도 같은 감각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혹시 꿈이 아닐까?” “지난 달만 해도 멀리까지 산책도 갔는데…” 집에 돌아오면 타닥타닥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환청도 들립니다.
2. 분노하는 단계
부정과 충격으로 마비된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분노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도대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병원에서 혹시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 “아냐. 내 탓이야.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야.” 이때의 분노는 상실을 막을 수 없었던 나 자신에게로 향하여 죄책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힘내. 시간이 약이야.”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해 주는 지인마저 미워집니다. 분노 조절이 안 되면 사람들에게 벌컥 화를 내거나 시비를 걸게 되기도 합니다.
저 역시 더 온전하게 많은 치료를 해피에게 해 주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은 죄책감으로 이어졌고, 각종 보조제와 피하수액까지 하며 동동거렸던 그간의 노력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로지 내가 못해 준 것, 더 잘해 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만 떠올라서 스스로가 미워지더라고요.
엘리자베스 퀴블러는 분노하고 있다는 건 억압했던 감정이 튀어나오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봅니다. 그 분노를 기꺼이 맞이하여 분노를 에너지 삼아서 걷고 또 걷는다든지 등산을 하는 등 신체적 움직임으로 풀어주길 권합니다.
분노를 가슴에 안은 채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그때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바보 같이 왜 그랬지?’ ‘다른 치료법을 시도해 보았더라면…’이라며 그 순간을 곱씹으며 끊임없이 상상하고 자책하게 되니까요.
또한 내가 신이 아니라는 것, 내가 모든 걸 통제할 수 없다는 걸(물론 이 단계에서는 이마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인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예전에 썼던 것 같은데, 우리 뇌는 처음에 장밋빛 상상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거든요. 뇌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고통을 탐색해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혹은 미래의 위험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 만큼... 찾아온 분노를 기꺼이 맞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글이 길어지니 다음 단계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어서 써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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