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나이트(Nick Knight) 사진전] 거침없이, 아름답게



한 인물을 볼 때 ‘어, 나랑 비슷하네.’ 싶은데, 다른 세계가 있으면 호기심을 느낍니다. 


혹은 정말 교차지점이 없는 사람 같은데, 본질적으로 무언가 맞닿아 있으면 매혹당하는 것 같습니다.


닉 나이트(Nick Knight)는 제게 후자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닉 나이트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몇 년 전이었습니다. 잠이 안 와서 소파에 앉아 티브이 채널을 막 넘기다가 (저는 이럴 때 볼륨을 0으로 맞춰 놓고 화면을 돌립니다. 그러면 티브이 속 어지러운 세상이 어항 속에 잠긴 것처럼 고요하거든요.) 한 케이블 채널에서 멈췄습니다. 굉장히 낯설고 강렬한 작품들이 보여서요.


                       ⓒ hypebeast.com 



잠깐 닉 나이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는 사진과 디지털 그래픽을 결합한 1세대 포토그래퍼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패션 사진, 디지털 영상 등에 이르는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죠.


처음에는 닉 나이트의 사진들을 보고 ‘자극적으로 튀어 보려고 이렇게 비틀어서 찍었나?' 하고선 채널을 돌리려는데, 이상하게 그 거친 불편함 속에서 왠지 모를 묘한 매력이 느껴져서 계속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뷰 장면에서 저는 완전히 매혹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건 방송작가가 써 준 대본이 아니라, 온전히 그의 철학이 담긴 ‘날것의 인터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때 메모해 둔 걸 다시 봐도 좋네요.


사진을 찍는 건 직업이나 기술이 아닌, 커뮤니케이션이다. 나는 내가 어떤 직업으로 불리어도 상관없다. 나는 그저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불안과 희망을 사진으로 보여 주고 싶을 뿐이다.”


“아트디렉터와 의견이 엇갈릴 때는 일의 본질로 돌아간다. 항상 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야 한다. 의견이 엇갈릴수록 도망치지 않고 더욱 풍성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터 새빌, 알렉산더 매퀸, 요지 야마모토 같은 이들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다르게 본다. 그래서 같이 일하고 싶어진다. 이들과 나 사이에 아트디렉터냐, 포토그래퍼냐 하는 명찰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서로 신뢰를 기본으로 한 ‘관계’ 속에서 일한다.” 


나는 명확한 결론을 갖고 작업에 임하지 않는다. 문제를 풀기 위해 조금씩 밟아나가며 포괄적으로 접근해 나간다. 그러나 피터 새빌는 사물을 통찰하는 분석 능력이 대단하다. 명확하게 사물을 바라본다. 문제의 핵심에 곧장 달려 들어가는 그의 방식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같이 일하는 것이 즐겁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일의 즐거움은 내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데 있다.”


“나는 사진의 기술적인 부분들이 싫다. 가끔은 이것이 나와 피사체 사이에 끼어드는 플라스틱과 금속 조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물론 때로는 그 녀석(사진)이 우연히 잡아내는 지점에 감동받기도 한다.”


이 외에도 주옥같은 말들이 많았는데요. 그는 어쩌면 사진가이기 이전에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경복궁 쪽을 갔다가 <닉 나이트 사진전>(NICK KNIGHT: IMAGE)을 보려고 대림미술관에 슬쩍 들러 보았습니다. 


헉,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았답니다. 이럴 때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관람을 합니다. 우선 마음을 비우고, 스윽 한 바퀴 돕니다. 그러면서 눈에 들어오는 작품을 찍어 기억해 두죠. 그 다음에 그 작품을 중심으로 봅니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이랄까요 :)


그리고 전시장의 카테고리보다, 제 마음에 꽂히는 대로 범주화합니다. ㅎㅎ 저한테는 전시장의 사진들이 세 가지 의미로 묶였습니다.


첫 번째는 ‘아름다움의 재정의’인데요. 닉 나이트 스스로도 이렇게 말하고 있네요.


“나는 아름다움을 정의 내리지 않는다. 다만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정형화된 ‘아름다움’의 개념을 뒤집는 일에 무척 관심이 있을 뿐이다."


기억에 남았던 사진들을 가지고 오자면,



         David Tool, 1998



가볍게 덤블링하듯 사진 속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 인물은 데이비드 툴(David Tool)입니다. 그는 어릴 때 희귀병을 앓아 다리를 잃었다고 해요. 하지만 댄서로, 또 연기자로 활동 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숨기지 않고 알렉산더 맥퀸이 만든 의상을 입고선 당당하게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닉 나이트는 정형화된 아름다움 대신 장애를 특별한 아름다움으로 포착해 셔터를 눌렀습니다.



Tatjana Patitz for Jil Sander, 1992



역시나 기억에 남았던 건 이 사진입니다. 닉 나이트는 여성을 상품화의 대상으로 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독특한 시도를 합니다. 사진 속 모델은 1980~90년대를 빛내던 슈퍼모델 타티아나 파티즈입니다. 기존의 촬영 방식으로는 모델의 얼굴을 부각했을 텐데, 닉 나이트는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화면 가득 흘러넘치도록 ‘의상 자체의 표현’에 집중해 촬영했습니다. 이를 통해 여성 모델 중심의 정형화된 패션 사진의 이미지를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Susie Smoking, Susie Bick for Yohji Yamamoto, 1988



이 사진도 기억에 남네요. 짧은 머리, 담배를 든 구부정한 자세에서 신비로움이 느껴집니다. 일반 패션 화보 속 여성과는 확연히 다른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색다른 시선으로 여성 모델을 보려는 닉 나이트의 신선한 관점이 느껴집니다. 






두 번째 범주로 저는 닉 나이트의 ‘경계의 넘나듦’이 느껴졌습니다. 


                                                          NICK KNIGHT Pink Powder, Lily Donaldson wearing John Galliano, 2008


이 작품은 2003년 존 갈리아노의 핑크 드레스를 촬영한 것입니다. 존 갈리아노는 인도 축제에서 영감을 받아 모델이 워킹할 때 드레스에서 핑크 파우더가 흩날리도록 디자인했다고 해요. 모델의 치마에서 핑크 파우더가 날릴 때 닉 나이트가 셔터를 눌렀고, 이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사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진이라는 것을 빛을 받아 인화지에 찍기만 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색을 넣어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해내는 도구로 보았죠. 누군가 그에게 “이게 사진입니까? 그림입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사진이기도 하고 그림이기도 하지요.”라며 씩 웃었다고 합니다. 





                                                          Dolls I, Micky Hicks, 2000


이 사진도 재밌습니다. 3~6세 아이들이 모델의 얼굴에 화장을 하면 닉 나이트가 촬영했고, 나온 사진을 프린트 해서 주면 그 위에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런지 순수한 발랄함이 느껴지네요.





Blade of Light for Alexander MaQueen, 2004


이 사진도 시선을 잡아끌었습니다. 이 사진은 알렉산더 매퀸 패션쇼 때, 모델들이 워킹 대신 춤추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촬영한 것이라네요. 안무가 마이클 클락과 무용수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모델들이 허공을 날아가는 순간을 어떻게 포착했을까? 궁금했는데, 연사촬영을 한 게 아니라 한 컷씩 촬영한 뒤 아홉 장의 사진을 합친 것이라고 하네요.




Porcelain Kate, 2013



이 작품은 (모델 케이트 모스+ 비둘기의 날개)를 3D 스캐너를 이용해 스캔한 뒤 이어 붙여 조각품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평면적인 사진에서 벗어나 ‘사진적 조각’까지 구현하는 그의 창의력이 놀랍습니다. 





                                                 Rose I, 2012




마지막으로 제 머릿속에 한 범주로 묶여 다가왔던 것은 그의 바니타스(vanitas) 철학이었습니다. 바니타스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를 의미하는 라틴어 ‘Vanitas vanitatum’에서 유래한 용어로 16세기와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주제죠. 주로 시든 꽃, 촛불, 비눗방울, 해골 등 결국 스러지고 말 것들의 비유를 통해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의 상기와 인생무상을 나타냅니다.


닉 나이트는 평소 장미를 좋아했다고 해요. 어느 날 장미를 찍었는데 실수로 인쇄 용지의 반대편에 프린트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용지 반대편에 묻은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바니타스 회화를 보는 듯한 영감을 얻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 형상을 촬영한 뒤 큰 프린터를 사용해 인쇄하고, 잉크가 마르기 전에 따뜻한 김을 쏘인 다음에 회화인지 사진인지 모를 지점의 작품들을 내놓습니다. 


닉 나이트에 대한 베이스 없이 그냥 봤다면 “충격적인 풍크툼을 구사하는 전복적인 작가구만.” 하고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잠 안 오는 밤에 그의 다큐를 보고 뭔가 매혹당했던 지점을 기억하고 작품을 바라보니 그의 철학이 재미있게 다가왔습니다. 


혹시 보러 갈 마음이 있으시면 3월 26일까지 대림미술관에서 하니까. 발걸음해 보세요. 참, 미리 대림미술관(www.daelimmuseum.org)에서 오디오가이드 앱을 다운받아 가시면 관람하시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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