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3단계 : 아이]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오늘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1부, (클릭☞) <세 변화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아이 이야기를 해볼게요. 


낙타는 묵묵히 순응한다면, 사자는 자기 삶의 주도권을 원합니다. 주도권을 원하는 만큼 내 뜻대로 일이 풀려야 한다는 통제력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자는 ‘이시적 상호의존성’에 대해서 간과합니다. 이시적 상호의존성모든 것들이 상호의존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상대의 미세한 변화로 사건의 출현이 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 미세 원인은 의지의 영향력을 벗어나 발생하죠.


즉 이시적 상호의존성이란, 내가 왼쪽으로 가겠다고 마음먹고(자유의지를 갖고) 왼쪽으로 가더라도 어느 날은 왼쪽 길이 공사 중이어서 오른쪽 길로 돌아가는 모든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우리가 다른 미세원인들로부터 무관할 자유입니다. 자기계발서 류가 비판 받는 건 이런 이시적 상호주의적 관점을 배제하고 오로지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자유의지만 강조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의 의지적 결단은(자유의지는) 주변 환경의 미세한 변화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사자가 주사위 게임을 하는데, 2:4로 상대에게 졌습니다. 사자는 분석을 시작합니다. 특정 모서리를 잡고 비틀어 던지니 높은 숫자가 나올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두 번째 게임에서는 높은 숫자가 나오게끔 살짝 주사위를 비틀어 던져 5가 나왔습니다. 여기까지는 자유의지의 승리죠. 그런데 상대가 하필 6이 나와서 지게 됩니다. 지친 사자가 다음 게임에선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던졌는데 2가 나옵니다. 사자는 ‘아이고 또 졌겠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상대가 1이 나와서 이겨 버립니다. 사자는 지면 져서 화가 나고, 이기면 이번에 이겼는데, 다음에 질까 봐(나의 통제대로 안 될까 봐) 불안합니다. 


아이는 사자와 달리 이기든 지든 매번 백지와 같은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더!” 하고 외치며 신나게 주사위를 굴립니다. 니체는 이런 백지와 같은 망각(oblivion)을 타자성의 보존으로 봅니다. 타자성의 보존이라는 말이 좀 생소하죠?


예를 들어 아이는 걸음마를 하다가 넘어져 울다가도 어느새 또 일어나 걷습니다. 아이는 정말 넘어진 걸 망각하는 걸까요? 아이 역시 넘어진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은 고통을 나의 본원적인 소유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타자성의 보존(고통은 외부와의 조건 속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 나의 본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니체가 말하는 망각물에 빠진 사건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신체 상태, 나의 능력이 변화했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조건 아래서 물과의 만남에는 더 이상 고통이 동반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 고통이나 특정한 느낌이 나의 본원적인 소유물로 귀속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백지와 같은 망각이요, 타자성을 보존하는 태도라는 거죠.


니체는 아이와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면 돌덩이 같은 과거의 장면도 뒤집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부모 없이 자란 애라 그런지 싹수가 노랗구만...”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똑바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성실하게 살아왔다면 과거의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닌, 나의 성장에 필요한 삽(삶을 뒤집는 계기)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이처럼 과거의 고통이 있을 때, 그것에 붙들리지 않고 현재의 위치판에서 재배열한다면 ‘나’라는 좁은 인간을 깨뜨리게 하는 ‘열린 지평의 사건’으로 재해석되는 지점이 있다는 겁니다. 




잠깐, 여기서 글 쓰고 넘어가 볼까요? :)


찍힌 필름 : 과거의 사건을 써 봅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재배열 : 그 사건을 지금의 관점에서 재배열해 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배우게 된 점은 무엇일까요? 다행인 점은 무엇인가요?


이시적 상호의존성에 대해서도 써 봅시다.


자유의지 관점에서 써 보기 :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 써 봅니다. 


이시적 상호주의 관점에서 써 보기: 그것이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었습니까?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다행인 면이 있나요? 혹은 불행이었나요? 백퍼센트 내 탓, 혹은 상대의 탓, 혹은 서로의 탓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를 지점에 대해 성찰해 봅니다. 



니체는 아이와 같은 재생력을 통해 우리 의식의 지평이 넓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위버맨쉬(Übermensch)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위버맨쉬란 초인, 등으로 번역되는데요. 간단히 말해서 어떤 상(象)을 정해 놓고 그것에 이르고자 애쓰는 것이 아닌, 아무것도 완성된 것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매 순간, 정성스럽게 현재진행형으로 나아가는 존재를 말합니다. 


오늘 니체의 아이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알프레드 디 수자가 인용한 시가 문득 떠오르네요.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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