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생기] 칼 융으로부터 배우는 번아웃 대처법 (12)

오늘도 이어서 (클릭☞양극성 통합)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해요.

 

융이 말했듯, 이렇게 억압된 자신의 양극성과 접촉하면 아주 놀라운 에너지가 탄생하는데요.

 

“어,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네.”라는 새로운 탐색이 시작되면서 그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 속 많은 부분들과 만나 마음의 생기가 돕니다. 

 

사실 번아웃 된 경우를 보면 주위 기대나, 환경의 제약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나 자신이 싫어서 스스로를 놓아버린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만사가 귀찮고, 내 욕구가 정확히 무언지 파악하기도 힘들어지는 거죠.

 

제가 상담과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의미 있었던 지점이 "나는 지금 무엇무엇을 하고 싶다."라고 매회기마다 4-5개씩 쓰는 것만으로도 내담자 분들이 생기는 되찾는 지점이었는데요.

 

그래서 내가 번아웃 되었다면, 역으로 자신의 욕구를 자각하고 그에 따라 살도록 북돋아줄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한번 써 보세요. 코로나가 끝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써도 좋고, 지금 하고 싶은 것을 써도 좋습니다.

 

나는 ______________ 하고 싶다.

 

나는 ______________ 하고 싶다.

 

나는 ______________ 하고 싶다.

 

나는 ______________ 하고 싶다.

 

 

이렇게 내 욕구를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무의식과 친밀해지기 때문에 삶에 생기가 도는데요.

 

제임스 매스터슨(James Masterson)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만든 거짓자기(false self)가 있다면, 좀 더 깊숙한 쪽에 근원의 자기와 연결된 참자기(융이 말한 Self)가 있는데, 참자기와의 연결성을 가지면 내적 파워가 생긴다고 봅니다.

 

 

이어서 양극성에 대해 좀 더 다루어 보자면

 

우리가 회피하고 싶은 감정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권태로움, 공허함, 외로움이 든다면? 융은 그 감정을 피하지 않고 역으로 아주 내밀하게 접촉해 보면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뭔가 회피하고 싶은 감정을 직면하고 거기에 가만히 머무르면 나머지는 무의식이 스스로 알아서 치유하기 때문인데요(Hansen et al. 2007)

 

만약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면? 그 무언가를 판단하지 않고 찬찬히 뜯어보는 겁니다.

 

제가 웬만한 동물은 다 좋아하는데, 뱀은 진짜 무섭더라고요.(저희 어머니가 꾼 제 태몽이 뱀인데도 말이죠) 시골에 있으면 뱀도 종종 봅니다.

 

그런데 뱀도 이렇게 요모조모 뜯어보면 되게 귀엽게 생긴 지점이 있습니다. 보면서 두려움이 올라오면 “아, 두렵구나. 물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지.” 하고 유의하면서도 가만히 바라보면, 햇살에 빛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비늘이 독특한데요. 쟤도 나름으로는 이쁜 구석이 있다는 거죠.

 

 

음,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가슴이 답답하다면? ACT에서는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하는 내담자에게 역으로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조절하려고) 애쓰지 말고 가만히 집중하여 머물러 보기를 권합니다.

 

여기서 좀 더 덧붙이자면 이 글(클릭☞스트레스 완화)에서도 언급했듯이 심리적 공간(저 위에 빈칸)을 갖고, 있는 그대로 느끼면 더 도움이 되죠.

 

그리고 번아웃 되어 재밌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융은 역으로 역치를 낮추기를 권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자극적으로 세고, 화려하고 번쩍이는 거 말고 역으로 천천히, 단조롭게, 심심한 가운데에서 그것을 내밀하게 느끼면, 참자기가 역동적으로 활동한다는 건데요.

 

우리 뇌는 지루함을 느낄 때 외부에서 자극거리를 찾지 못하면 자극을 찾아서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참자기(true self)와 만나면서 활동성을 띄게 된다는 거죠(Zomorodi, M, 2017).

 

그래서 물도 벌컥벌컥 마시지 말고 한 모금씩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셔 봅니다. 고요하고 세밀해질수록 오감이 되살아나면서 풍부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일도 그래요. 막 이것저것 멀티로 하면 도리어 생산성이 떨어지는 걸로 나타났습니다.  보고서 쓰면서 친구랑 카톡하고, 자료 서치하면서 처리해야 할 일을 하고 이런 듀얼 상태가 오히려 스트레스만 가중시킨다는 거죠,

 

차라리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는 게 낫습니다.

 

 

아무튼 말이죠. 굳이 융 아저씨의 이론을 하나하나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삶에 양극성을 역으로 활용해 보면 얻어갈 지점이 많습니다.

 

 

남보다 쉽게 성공하고 싶다면? 오히려 어렵게 살 각오를 다지는 거죠. 인터뷰하면서 자수성가한 분들 스토리를 듣고 있으면 자살 문턱까지 한 번씩 다녀온 분들 많습니다. 이분들이 삶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가 “어차피 첨부터 잘 될 생각 버리는 게 낫다. 안 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산다.”라는 삶에 대한 맷집이 있더라고요.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불행을 인정하면 행복할 수 있는 지점이 더 돌올하게 보입니다. 재작년 이맘때쯤 저는 병원에 있었네요. 엄마를 간호하면서. 그때 제 소원이 집에서 수면 잠옷 입고 맥주 한 캔 하며 영화 보는 거였거든요. 불행을 인정하면, 지금 이 순간이 다행이고 감사한 지점도 보이죠.

 

자유로우려면? 역으로 운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봐요. 내가 못 가진 거, 남들하고 비교하느라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 오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더 자유로움을 준다는 거죠.

 

제가 요즘 rm의 왕팬이 되었는데요. 어느 해외 팬이 요즘 마음이 힘들다고 남긴 글에 rm이 단 댓글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맞아요.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며 살 수도 없고 내 기대대로 타인을 바꿀 수도 없죠.

 

어쩌면 누군가를 바꾼다는 것 자체가 교만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뭐라고. 나 자신도 제대로 못 바꾸는데 말이죠.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삶의 의미를 느끼고 살고 싶다면? 역으로 삶의 허망함마저 받아들여보는 거죠. 솔직히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뭔가 대단하지 않아도, 그냥 좀 모자라도, 이번 생에 이렇게 나를 만났으니까 나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고 좀 잘해 주면서 살 필요가 있다는 거죠.

 

융과 아들러가 강조하듯 쓸데없는 열등감의 기저에는 = 쓸데없는 우월감이 있습니다.

 

“에휴, 살아서 뭐하냐. 콱 죽어버리고 싶다.”라는 열등감 뒤엔 “내가 적어도 이 정도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라는 ‘거대자기’가 숨어 있다는 거죠.

 

나 자신이 바보 멍청이 같다고 하는 마음 뒤에는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잘난 사람인데, 왜 나를 몰라줘! 라는,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는 거죠.

 

사실 어느 쪽도 진정한 나는 아니죠.

 

 

자존감 프로그램 진행할 때 어떤 분이 “그렇게 말하는 샘의 자존감은 어디서 오느냐?”라고 물었는데, 저 같은 경우엔 역으로 ‘마음의 소박함’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나를 부풀리거나 비하하지 않고 자연스러울 때 저는 행복하더라고요.

 

어릴 때 엄마가 만들어 준 꽈배기, 하굣길에 친구들이랑 먹던 떡볶이, 눈 내리던 날, 김이 펄펄 나던 칼국수를 나누어 먹던 기억(그러고 보니 주로 먹는 것에 연관되어 있네요 ㅎㅎ) 뭔가 소박하게, 진심으로 나누었던 추억들이 저를 행복하게 하고 앞으로도 행복하게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소박함을 가슴속에 지니고 산다면 자기초점주의(Self-Focused Attention)로부터 좀 홀가분해질 수 있다고 믿어요.

 

(자기 초점주의 :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외모나 행동에 과도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자기 초점주의에 빠지면 부정적 감정이 올라와 우울을 유발하죠)

 

 

그러니까 강해지고 싶다면? 역으로 약한 나를 인정해 주는 거죠.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인정하고 받아주면 무의식과 마음, 영혼이 한 팀으로 활약할 수 있다고 융은 봅니다.

 

아프지 않으려면? 물론 병원에 가고, 몸에 좋은 것 먹고, 운동하고, 좋은 생각도 하고 다 좋아요. 그런데 역으로 아플 땐, 질병을 친구처럼 받아들여 보는 거죠. 논문에 보니까 질병과 동행하며 잘 앓다가 친구처럼 보낸다는 마음가짐이 질병 치료에 효과적이더라고요.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사랑받고 싶다면? 역으로 먼저 사랑을 주는 겁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마음 기저에는 사랑 주고 싶은 마음을 억압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역으로 나 혼자 사랑을 주기만 한다면? 한번 상대한테 받아 보는 겁니다. 받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표현도 해 봅니다.

 

융은 우리가 어떤 것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자기가 싫어하는 지점을 알아차릴 수 있고

 

반대로 어떤 것을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이런 양극의 지점을 접촉하고 통합해 나갈 때 비로소 내 삶이 생기 있게 꽃 핀다는 거죠.

 

아, 쓰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다음에 이어서 써 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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