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나의 욕망일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일까?

 

 

요즘 코로나 때문에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위축된 것 같아요. 저 역시 3월에 진행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워크숍이 보류되었는데요. 저야 함께 하는 직원이 없으니 저 하나 책임지면 되지만, 딸린 식구가 많은 사장님들, 손님이 오지 않는 자영업자분들, 중국에서 원자재를 가져와야 하는 관련 기업들은 타격이 클 테니 걱정이 됩니다.

 

어제는 제 첫 내담자였던 A, 저 한국 돌아오자마자 돈 벌었어요.”라고 하길래 취직한 줄 알았더니 체측알바(?)를 했답니다. 코로나가 의심되는 분들 체온을 측정하는 아르바이트인데 시급이 세다고요. 아이고 ㅠ..

 

보건소에서 일하는 친구도 요즘 새벽까지 일한다더니 얼굴이 초췌해졌더라고요. 이 친구 말이 치사율은 메르스 때보다는 훨씬 낮은데, 전파 속도가 빨라서 걱정이라고요. 요즘 다들 서로에게 예민해져 있어서 민원인들뿐만 아니라 동료들 사이에서도 신경과민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좀 물러갔으면 좋겠네요.

 

요즘 저는 메타지능을 파다가 자아확장성에 꽂혀 있는데요. 결국 메타지능을 높이려면 자아확장성의 단계로까지 가야 한다는 거죠.

 

시작은 를 위한 욕구와 욕망에서 출발하더라도, 자아확장성 단계까지 이르러야 삶의 에너지가 꽃피는데요. 스캇펙은 자아확장성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면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면 가장 빨리 깨치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랑할수록 더 알고 싶고 궁금해지니 탐구하게 되고, 이런 일련의 과정 자체가 즐거우니까요. 반면 해야 해서 그저 시늉에 그친 것들이나 어떤 자격이나 문턱을 넘기 위해 했던 건 금방 휘발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나의 욕망이란 것도 그래요. 내 욕망이 아닌, 알고 보면 타자의 욕망으로 점철된 경우도 많죠. 그래서 자크 라캉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짜 내 욕망을 알고 싶으면 그 욕망을 가지지 않은 집단으로 한번 들어가 보라고요.

 

자크 라캉에게 사례를 보태자면 후배 C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C가 말하길 팀에서 자기 빼고 다 기혼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신만 뒤처지는 것 같아서 소개팅도 하고, 검도, 스킨스쿠버 등 이성이 많은 동호회에 가입해 활동했는데 그럴수록 마음만 허해지더래요.

 

그런데 이번에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는 대부분이 싱글이랍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결혼하고 싶은 욕망이 싹 사라졌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들 고양이를 한 마리씩 키우고 있어서 나도 고양이 한 마리 키워 봐?’ 라는 생각이 들더래요.

 

그런데 과연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욕망은 정말 나의 욕망일까?” 싶은 의문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아픈 노묘를 돌보는 집사 까페를 링크해 주었습니다.

 

특히 신부전이랑 녹내장은 노묘의 단골 병인데, 만약 나중에 투병을 하게 되면 하루에 6번 시간 체크해서 안약을 넣을 수 있는지, 나비침을 등에 꽂아서 수액을 하루 세 번 맞출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너무 키우고 싶으면 한 번 키워보라고요.

 

까페에 들어가서 집사들의 간호일기, 무지개 다리 건넌 고양이 이야기를 읽던 C는 아무래도 본인은 야근이 잦고, 혼자 사는 데다, 간호할 여력이 안 될 것 같다며 유기묘를 여럿 돌보는 집사에게 얼마 기부하는 것으로 고양이에 대한 욕망은 마무리되었는데요.

 

암튼 이것이 진짜 나의 욕망인지 알고 싶으면 그 욕망이 없는 집단이나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보는 것, 그리고 그 욕망으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어려움을 내가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는지 자각하는 건 중요한 지점이죠.

 

빅터 프랭클은, 어떤 욕구가 단지 욕구에 그치는 게 아닌, 진심으로 사랑하는 확장성의 단계에 이르면 설사 그것이 고통과 시련으로 오더라도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고 하는데요.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보면 이런 사례가 잘 나타나 있죠. (pp.186-189)

 

한번은 나이 나긋한 개업의 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다. 내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을 제외하고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했다.

 

선생님, 만약 선생께서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말했다.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선생님, 부인께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겁니다. 부인에게 그런 고통을 면하게 해 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그 대가로 지금 선생께서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내게 악수를 청한 후 진료실을 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게 되는 자는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딘다.

 

 

p.198

염세주의자는 매일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에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의미를 찾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의 뒷장에다 중요한 일과를 적어 놓은 다음 그것을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 있는 그 풍부한 내용들, 그 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반추해 볼 수 있다.”

 

 

pp.230-231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일을 통해서, 두 번째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함으로써,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 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자신의 시련을 자랑스러워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만들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만을 다만 부끄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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