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탄력성] 한 해를 돌아보며

코로나로 인해 칩거하며 글만 쓰다 보니 뭐랄까요. 요일이나 달의 경계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달력을 넘기다가 비로소 ‘아, 벌써 올 해의 마지막달, 끝을 향해 가고 있구나.’ 이런 자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이 무렵이 되면 올 한 해 동안 일어난 10대 뉴스를 다이어리에 쓰곤 하는데요.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한 번 써 보세요. 올 한 해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에 유독 남는 것, 기분 좋았던 것, 슬펐던 것 다 좋습니다. 딱 10가지만 차례대로 써 보세요.

 

그럼 보통 패턴이 드러나죠. 어떤 사람이나 일이 등장하기도 하고, 내 주요 관심사는 무엇이었으며, 나를 기분 좋게 했던 것, 힘들게 했던 것도 드러납니다. 나를 기분 좋게 했던 것은 새해에도 꾸준히 이어갈 수 있게 하는 겁니다.

 

힘들게 했던 것이라면 그 요인은 무엇인지, 그걸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대안행동은 없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이고 감사한 점에 대해서도 돌아보는 거죠.

 

 

며칠 전에 어떤 분이 2016년 끝무렵에 블로그에 쓴 글을 보고 메일을 주셨더라고요.

 

지금이 2021년이니까... 만약 블로그 글을 꾸준히 쓴다면, 2027년에 어떤 분이 지금 이 글을 읽을 수도 있겠죠?

 

시공간이란 것도 그래요. 달력이나 시계는 사람이 만든 인식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꿈꾸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어제는 친구랑 통화하다가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물론 노력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누군가 길에서 울고 있다면, 그 사람이 무조건 노력을 안 해서 저러고 있다는 말은 못하겠습니다. 그냥 그 사람 인생에서 저러한 시기, 그런 운의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그래요. 나 혼자 잘 나서 살아온 것 같고, 내가 노력해서 다 한 것 같아도 삶의 터닝포인트에는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분들이 있고, 하늘이 도운 적도 많았구나, 싶습니다.

 

사실 명리학적으로 보면 올해가 신축년이었는데, 제 인생에서 가장 몸을 사려야 하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무술월에는 길 가다가 오토바이에 치일 뻔했는데, 정말 간발의 차이로 앞바퀴가 제 발 앞에 멈추었습니다. 만약에 그때 치였으면 지금 병원에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얼마 전엔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당연히 못 찾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갑 안에 있던 현금이 단 한 장도 쓰이지 않고 고스란히 있는 채로 어떤 분이 돌려주셨습니다. 감사해서 사례금을 드리니까 아니라고 웃으면서 사라지셨습니다.

 

그 분을 위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데요. 앞으로 살면서 저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돕고 사라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삶이라는 게 그래요. 만약에 선택의 순간에서 내가 그러한 선택을 안 했다면, 만약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 여기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무수한 우연과 노력의 조합이란 거죠.

 

요즘 자아복합성에 꽂혀서 ‘내면아이 찾기’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데, ‘아, 우리 부모님 안에 이런 내면아이가 살고 있었구나. 이 친구 안에 이런 내면아이가 살고 있었구나.’ 마루타(?)로 프로그램을 돌려보면서 새삼 짠한 지점이 느껴지더라고요. 어릴 때 형성된 자아정체감이 이토록 긴 끈으로 당신의 발목을 감고 있구나, 싶으면서도 발달은 인생 후반기에도 멋지게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내면아이를 돌아봐도 그래요.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해서 엄마 치마 뒤에서 손가락을 빨던 아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도 아이들한테 치여서 집에 빨리 돌아가 낮잠을 자고 싶던 아이. 이 아이는 아직도 제 안에 살고 있죠.

 

전 솔직히 이 나이가 되어서도 세상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대고 물어보기도 해요. 그러면 꼭 무선통신하듯이 꿈에서라도 보여주고,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통해 알려주기도 합니다.

 

섬세하고 내성적이고 쭈구리 같은 아이와 10세에(보통 이 나이에 주페르소나가 형성되거든요) 반장이 되어 학급회의를 진행하던 아이

 

전자와 후자의 갭이 저를 살리는 정신적 역동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게 되었는데요.

 

그 쭈구리 같은 아이가 있어서 섬세하게 마음을 포착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하고, 후자의 아이가 있어서 사람을 연결하고, 리더십도 발휘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가치가 전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 자신을 대하거나, 가족을 대하거나, 친구를 대하거나, 세상 사람을 대하거나... 그냥 내 가치(나도 잘 되고, 상대도 잘 되고)에 부합하면 설사 당장은 상처받고 바보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도, 나중에 보면 선물로 돌아오더라고요.

 

저는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배우고 성장하고 싶습니다. 제 내면아이가 그걸 원한다는 강력한 욕구를 느끼거든요.

 

회복탄력성에 대한 연구를 죽 보다 보면 결국 이 내면아이를 꾸준히 살리고 뽀뽀해 주고 키워주는 것, 상처받은 지점이 있으면 꼭 안아주고, 때로 스크래치가 나더라도 그건 독특한 나만의 문양을 그려나가는 과정이라는 것, 설사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다 잃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지지해 주고 사랑해주는 것, 가장 누추한 지점의 나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금씩, 조금씩 20m씩 후레쉬 비추면서 손 잡고 걸어나가는 것,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새해가 되면 개운법 차원의 글을 썼는데, 요즘 얻은 통찰은 그래요.

 

행운으로 작용하는 일이나 사람은 그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역동이 기분 좋은 것, 더 성장하고 배울 수 있게 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나도 괜찮다는 든든한 안정감을 준다는 것.

 

아무리 세상적으로 잘 나가고, 이해관계적인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것 같아도 그와의 사이에 벌어지는 역동이 상처가 되고, 아픈 나만 만져진다면 좋은 인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한편으론 그래요. 나는 그 사람에게, 그 일에게 얼마나 괜찮은 영향을 주었나? 그냥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돌아보게 됩니다. 내 말 한마디로 상처를 준 건 아닌가? 소중하게 여기지 못한 건 아닌가? 일을 할 때도 그래요. 그냥 일을 위한 일을 한 것은 아닌가. 이 일이 생명체라면 그런 나에게 서운해하지는 않을까.

 

잘 풀리는 분들 보면 세상만물을 생명체처럼 대하더라고요. 물건 하나를 골라도 사랑하는 사람 대하듯이 고르고, 돈도 그렇게 대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돈도 에너지의 흐름이 응축된 매개체죠. 내 몸도 그래요. 세상에 태어나서 내 소유물인 것 같지만 내가 잘 품고 살아야 하는 에너지의 저장소이기도 합니다.

 

자두 속에 씨가 박혀 있듯, 내 안에는 내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쉼보르카 할머니의 말씀처럼 저는 각자의 내면에는 당신 영혼이 걸어갈 씨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거든요. 각자 컬러가 다르고 세상에 쓰이는 쓰임새도 다르다고 봐요. 그러니 타인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그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요 씨앗에게 자꾸 말을 걸어보는 겁니다.

 

2011년쯤이었을까요. 어떤 글을 봤는데, ‘아! 세상에 이런 멋진 글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던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진은영이란 철학자입니다. 운명이란 참 신기해서 5년 뒤에 저의 지도교수님이 되었죠.

 

쉼보르카 할머니의 시적 통찰에 대해 진교수님은 이렇게 풀이합니다. “일상의 태만하고 물렁한 과육 속에 콕 박혀 있는 각자의 영혼을 깨운다면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거야.” (전문을 읽고 싶으시면 클릭☞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이 글 보시는 분들 모두 새해 복 듬뿍 받으시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번에 쓰다 만 순방향-역방향 이야기는 새해에 이어서 써 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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