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계자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력을 가지고 있는 마음

 

 

제가 요즘 명리학도 같이 보고 있는 이유는, 핵심감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반사판처럼 그 자신을 습관적으로 비추는 뉘앙스적인 감정이 있는데, 이 감정은 평생 그 자신을 따라다니며 핵심감정의 축을 이룹니다.

 

그런데 척도 검사와 그의 살아온 내력 삽화만으론 뭔가 맥이 잘 안 잡히는 느낌이 들었는데, 명리학을 통해 들여다보니 그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감정 오행이 무엇인지, 그 사람을 생하고 있는 감정 오행이 무엇인지 타고난 생년월일시로 대입하다 보니 에너지적인 흐름이 보여서 도움이 되더라고요.

 

 

임상으로 주변 지인들을 봐 주고 있는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요즘 여기저기서 전화가 와서 당황스럽습니다. (에... 전화 안 받아서 미안합니다. 저 올해 가기 전에 책도 마무리 지어야 하고, 올 겨울까진 서울 갈 생각도 없어 못 만나요^^;)

 

그런데 재밌었던 부분이 처음에는 당신 것만 봐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주변 지인들 생년월일시를 가지고 와서 “아니, 이 분은 어떻게 이런 스펙으로 이렇게 잘 나가는 거지?”라든지 “너도 걔 알지? 어떻게 그런 외모와 능력으로 저런 사람이랑 결혼했지?” 등등 묻는데요.

 

그런데 이건 사주 명리학을 떠나서, 무경계 자본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겉으로만 보여지는 지점들만 가지고 비교, 분석하는데 사람도 일종의 에너지체거든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세상적인 스펙이 높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잘 나가지? 저건 운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을 텐데, 막상 그런 분을 만나 인터뷰하다 보면 그 분에게 어떤 활기, 매력, 자존감 등 에너지적인 어떤 끌림적인 요소가 있다는 거죠. 저는 그게 무경계 자본이라고 봅니다.

 

솔선수범하는 것도, 배려하는 것도, 공감하는 것도, 믿어주는 마음도, 이해해주는 마음도, 리더십이 있는 것도, 자신의 감정을 잘 돌보고 다스리는 것도 저는 무경계 자본이라고 봅니다. 다만 겉으로 안 드러나서 그렇지, 막상 함께 부대끼며 생활하다 보면 이런 무경계 자본이 톡톡히 빛을 발하거든요.

 

겉으로 드러나는 스펙과 더불어 무경계 자본도 풍부하면 금상첨화죠. 그런데 격차가 크면, 특히 후자가 더 크면 물론 처음에 진입장벽에서 고생은 할지 몰라도, 일단 진입하면 죽죽 치고 나갑니다. 인터뷰하면서 이런 케이스를 많이 봤거든요.

 

라포(rapport)도 어떤 면에선 무경계 자본입니다. 라포가 뭐겠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상호신뢰관계에서 비롯된 친밀함 아니겠어요?

 

이 라포도 무경계 자본에 속하는 게, 아무리 돈이 최고인 세상이라지만 내가 정든 사람, 내가 정든 곳, 내가 마음을 다한 어떤 것에 대한 애착 역시 돈을 능가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밖에서 본 매끈한 선남선녀보다 때로 웬수 같아도 내 가족이 더 귀하고 이쁘고, 거리에서 만난 품종 좋은 멋진 강아지보다 함께 오래 살아온 잡종개인 우리집 강아지가 내 눈엔 더 친밀하고 귀여운 것처럼요. 사회에서 만난 잘 나가는 친구보다 이해관계적인 측면에선 별 도움이 안 되더라도 학창 시절 떡볶이를 먹으며 시시덕거리던 추억이 있는 친구를 만나면 뇌에서 세로토닌이 퐁퐁 분비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겠죠.

 

 

《자기 앞의 생》에 보면 이런 무경계 자본에 대한 절묘한 대목이 나오죠. 모모는 고아원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렇게 되면 강아지는 떠돌이 개가 되어 불행해질 테니까, 강아지의 행복을 위해 부잣집에 입양 보내죠. 모모는 강아지를 입양한 주인이 준 돈을 하수구에 돈을 버립니다. 모모에겐 그 돈도 절실했을 테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생명에 대한 마음을 지키고 싶었던 거죠. 

 

가미카제 특공대가 과연 왜 자신의 목숨을 그렇게 쉽게 버렸을까요? 저는 이념이나 철학, 가치, 사랑 모두 무경계 자본으로 보고, 이러한 파워는 때로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에너지적인 저력이 있다고 봐요.

 

결국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사는데-그 궁극의 지점에는 생명력(Self)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명력이 현상계에서 물리적으로 발현된 게 에너지이고, 이 에너지는 돈(돈이 있으면 에너지의 풍부한 확장이 이루어지므로), 명예(에너지를 보호하는 신뢰도가 되어주겠죠?), 사랑(에너지를 증폭시키는 매개 감정), 외모(아름다운 것을 보면 기분 좋아지는 것도 에너지 상승에 도움)도 다 그런 도구적 측면의 발현이겠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위 단계에서 상위 단계로 가는 길은 제약이 많지만, 상위단계(생명력에서 출발)에서 하위 단계로 내려가면 시너지가 더 많이 납니다. 저의 이런 생각과 거의 일치한 생각을 하는 분이 스캇펙(Morgan Scott Peck) 박사더라고요. 이 분은 엔트로피의 힘을 하위에서 상위로 높이는 데는 중력이 작용하지만(에고가 만드는 것이므로 한계가 있음) 상위에서 하위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하면 또 5차원으로 넘어가니까 이만 줄이고,

 

 

책 추천을 하나 할까 해요. 신수정 선생님의 《일의 격》이란 책인데요. 이 분 글을 우연히 페이스 북에서 구독하면서 종종 감탄한 지점이 이 분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닌, 섬세한 스나이퍼 기질을 가졌구나(구성원과 리더의 신발 밑창에 절그럭거리는 돌멩이의 형태까지 보아내는 눈이 있는 분이시구나), 더불어 생명력을 향한 선한 의도를 마음 중심에 놓고 있는 분이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간 말씀하신 부분 중에 특히 인상적인 대목이 라포도 자본이라고 통찰한 지점(그러니까 이직할 때 연봉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회사와의 라포 형성이 있으면 조금 더 준다고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에서 연봉을 지금 회사보다 더 준다고 했을 때, 현 회사와 구성원과의 라포가 그 이하라면 물론 돈을 보고 바로 옮기지만, 그 이상이라면 쉽게 못 옮긴다는 거죠.)

 

특히 돋보이는 대목은 ‘일자리’에 대한 소명의식이 아닌 ‘일’에 대한 소명의식이 필요하다는 대목입니다. 직업 피아니스트로서의 소명의식은 그가 그 직업을 잃었을 때 좌절하게 되지만, ‘음악’이라는 소명의식이 있다면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거죠. 같은 맥락에서 ‘기업임원’으로서의 소명의식은 그가 임원자리에서 내려오며 끝나지만, ‘경영’에 대한 리더십은 어떤 방식으로든 흘러가기 마련이고, ‘교사’로서의 소명의식은 그가 교직을 은퇴하면 무용지물이 된 느낌을 받지만 ‘교육’에 대한 소명의식이 있다면 다른 자리에서 그 업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일자리의 정체성과 일의 정체성의 분리하라는 거죠. 이 지점은 상담심리학적으로 봐도, 삶의 질을 좌우하는 매개 변수가 되거든요. 업에 대한 더 큰 가치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당장은 별 볼 일 없어도 배짱이 있습니다. 거리에서 호떡을 팔아도 내 호떡을 먹는 사람도 행복해지고, 나도 잘 되고 싶다는 가치가 있다면 호떡에 대해 연구하게 되고, 그 연구가 결국 호떡으로 빛을 발하기 때문이죠.

 

저는 이 모든 게 무경계 자본으로 수렴된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이 외에도 업에 대한 신수정 선생님의 철학이 돋보이는 대목들이 많으니, 곁에 두고 한 꼭지씩 오가며 읽기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들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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