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그런 때 있지 않나요? 평소에는 그냥 넘길 일인데, 막 화가 난다든지 별스럽지 않은 일인데 불안하게 느껴진다든지, 사소한 실수에도 짜증이 난다든지, 같은 거리를 걸어도 더 황량하게 느껴지고, 그냥 스치듯이 들은 유행가에도 울컥 눈물이 난 적은 없으신가요?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갑자기 참을성이 없어지기라도 한 걸까요?
정서에 관련된 논문을 보면, 자아 고갈(ego depletion)에 의해 우리가 생각보다 많이 휘둘리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요.
자아 고갈(ego depletion)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행동을 다루는 능력이 소진되었을 때를 뜻합니다.
Inzlicht와 Gutsell 교수가 자아 고갈에 대한 실험을 했는데요. 간략하게 요약하면 슬픈 영화를 A그룹과 B그룹에게 보여 주고, A그룹에게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하게 하고, B그룹에게는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억제하라고 지시했는데요.
이후에 Stroop Task를 실시했는데, 그러니까 스트룹 검사란 예를 들어서 화면에 ‘마음밑돌’이란 단어가 나오면 마음밑돌이라고 읽지 말고 검정색이라고 읽는 겁니다. 즉 단어의 의미보다 색에 집중해서 답해야 하는데요.
그런데 만약 녹색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빨간색으로 쓰였다면 ‘빨간색’이라고 반응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립니다. ‘녹색’이라는 글씨를 읽고 ‘녹색이라는 의미를 억누른 다음’에 ‘빨간색’이라고 답해야 하니까요.
암튼 말이죠. 슬픈 영화를 시청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야만 한 B그룹은 A그룹에 비해 스투룹 검사 반응이 더 느렸고 실수도 잦았다고 해요.
실제로 뇌파 기록(EEG)을 통해 살펴보니 자기 절제와 관련된 전측대상피질의 활동이 약화되어 있었고요. 이 부분의 활동이 둔화되면 반응을 통제하는 데 다소 어려움을 겪어서 실수가 잦거든요.
즉 B그룹 사람들은 감정을 억제하느라 자아가 고갈되었고, 따라서 자아가 고갈되지 않았다면 훨씬 쉽게 성취할 일도 힘겹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살면서 자아 고갈은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몰라요. 감정적 반응을 억제해야 후딱 할 일을 해치우니까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자아고갈 되었는지 스스로 잘 모릅니다. 실제로 정상 범주와 자아 고갈 상태를 우리는 잘 구별 못하거든요. 매번 뇌파 검사를 통해 자아가 고갈되었는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하지만 Baumeister가 자아 고갈이 되었을 때의 신호를 밝혀냈는데요.
우리가 자아 고갈이 되면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강렬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슬픈 영화를 봐도 더욱 슬프게 느껴지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들어도 자아고갈이 되었을 땐 더욱 울컥하게 다가오고, 차가운 물에 피부 접촉을 하면 평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 반응합니다(R. F. Baumeister et al, 2010).
그러니까 평소보다 더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면, 자아 고갈이 일어난 것으로 감지해야 합니다. 이땐 뇌 회로가 감정을 평소처럼 조절하기 못하기 때문에 감정이 증폭되어 있다는 거죠.
저는 방금 전만 해도 자아 고갈씨를 만났던 것 같아요. 논문을 좀 손 보다가 거실로 나갔는데, 티브이에서 소녀 가장인 열 살짜리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동생 씻기고 입히는데 왈칵 눈물이 납니다. 뉴스 채널로 돌리니 세상의 온갖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화딱지가 나고요. 영화 채널로 돌리니 <토탈 이클립스>가 나옵니다. 랭보로 분한 디카프리오가 내던지는 대사가 돋을새김으로 박힙니다. 예전에는 졸면서 본 영화가 가슴팍에 판화처럼 찍힙니다. 논문 때려치우고 랭보의 시나 실컷 읽고 싶습니다.
하지만 Baumeister가 이렇게 속삭입니다. “평소보다 더 강렬한 감정을 느끼니? 그렇다면 상황에 휘둘리기 전에 ‘아, 지금 자아 고갈이 되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고 한 걸음 물러서서 잠시 쉬거나, 5분이라도 바람을 쐬거나, 잠깐 명상 하거나 에너지바라도 먹어 주는 게 어때?”
그래서 강아지 데리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와서 따뜻한 대추차 한 잔 마시고 나니, 아 갑자기 블로그 글도 쓰고 싶고, 기분이 한결 더 나아진 것 같아요.
그러니 이 글 보시는 분들도 뭔가 강렬한 감정이 느껴진다면, 그리고 그 반응의 강도가 강해지기 시작한다면 잠시 쉬어가세요. Baumeister의 조언을 참고해서요.
음, 그런데 말이죠. 자아 고갈이 자연스러운 거라면, 그걸 인정하고 대처하는 능동적인 방법은 또 없을까요? 그건 다음에 써 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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