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와 융] 현재는 미래에 의해 형성된다

 

요즘 제가 새로 만나는 내담자 중에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친구가 있는데요. 굉장히 창의적인 친구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엊그제는 “제 과거는 망쳐버린 도화지 같아서 이젠 그 위에 어떤 그림을 그려도 엉망일 거예요.”라고 하는데 무심코 던지는 표현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직관이 발달한 친구라 자기감정을 잘 인지하고 있고, 그걸 굉장히 생생하게 묘사하는 편인데요.

 

그 친구에게 아들러와 융 이야기를 살짝 해 줬는데, 생각보다 큰 흥미를 보이더라고요. 대략 정리하자면 누구나 우리는 과거에 얽매여서 살아가는데요. A라는 상황에서 상처를 한 번 입었다면 이젠 A와 비슷한 상황이 오면 불편하고 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A뿐만 아니라, ab, aBC, Add, Aefg¨ 등등... A의 요소가 섞인 것은 약점이 되고 말죠. 

 

하지만 이렇게 우리 내부에 새겨진 A라는 과거보다, 우리를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미래’라고 힘주어 말하는 심리학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아들러(Alfred Adler)와 융(Carl Gustav Jung)인데요. 이 분들은 인간을 과거의 산물이 아닌, 내가 설정한 미래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보았죠.

 

한 인간이 성장하는 데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어떤 상(像)이 마치 자석처럼 그의 내부를 뒤흔들고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향해 움직인다는 겁니다. 아들러는 한 개인의 심리적 현상을 알고 싶다면 그가 갖는 미래의 이상향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예를 들어 보통 우리가 우울할 때는 기가 죽을 때라든지, 어쩐지 자신감이 없고 스스로가 작아질 때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사실 은밀한 층으로 들어가면 그 뒷배경에는 ‘거대 자기’가 있습니다. ‘나는 저 정도의 삶은 살아야 하는데. 왜 이런 직업을 갖고 살지? 나는 괜찮은 사람이랑 결혼했어야 하는데, 왜 이런 사람과 결혼했지? 내가 꿈꾸던 집은 이런 데가 아닌데 왜 이런 집에 살지?’라는 미래의 이상향 속 ‘거대 자기’와 ‘지금의 나’ 사이의 격차에서 발생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자기 상(像)은 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고, 역으로 현재에 대한 결핍을 만드는 구멍 역할도 한다는 거죠.

 

인터뷰를 해 보면 보통 영업을 잘하는 분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고객을 설득할 때 ‘미래지향적인 상(像)’을 건드려 준다는 점인데요. 예를 들어 자동차 판매왕인 김연중 씨는 차를 팔 때 “이 차도 좋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거나, 식구가 늘면 이 차는 좀 작게 느껴지겠죠.”라며 고객이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게 해서 구매할 수 있게끔 돕는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사라졌는데, 명동에 로샤라는 옷 가게가 하나 있었거든요. 여기 이모님이 옷 입는 센스가 있으시기도 하고, 저를 딸처럼 예뻐하셔서 대학 시절부터 몇 년 전까지 이 집 단골이었거든요. 제가 뭘 고르려고 하면 “그 옷도 좋아. 하지만 오래 데일리로 입으려면 저 옷이 더 낫지.” 이렇게 설득해서 저렴한 옷보다 질 좋은 옷을 사게끔 하셨는데요. ㅎㅎ 

 

그러고 보면 영업뿐만 아니라,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대부분의 분야가 돌아가는 원동력의 중심축은 ‘미래의 청사진’인 것 같습니다. 설사 그렇게 될 수 없더라도 그러한 청사진을 갖고 있다면 현재의 삶의 결이 달라진다는 거죠.

 

제가 유치원 때는 담임 선생님이 “이르고는 자폐아 같아요.”라고 할 정도로 내성적이었는데요. 하지만 그때마다 부모님이 “우리 딸은 좀 더뎌서 그렇지. 얼마나 똑똑하고 예쁜데.”라고 믿어 주었습니다. 만약에 “우리 딸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걱정이다.”라며 불안해하셨다면 ‘나는 모자라다.’라는 미래에 대한 상(像)을 내부에 심고 자랐겠죠.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미래 상(像)이 아이의 삶에는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니까요. 

 

그러니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 아이가 다른 아이랑 좀 달라서 걱정이 된다면 “지금은 방황하더라도 우리 아이는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게 될 거야. 나는 믿어.”라는 태도로 아이들을 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의식적으로 귀신같이 알거든요. 

 

한 연구에 의하면 어떤 빈곤 가정의 소년이 누추한 옷차림을 하고 있을 때, 교사들은 이 소년이 공부를 못할 거라고 추측해서 소년에게 주의를 덜 기울이고, 난이도가 있는 공부 자료는 덜 제공했다고 해요.

 

이때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교사의 추측에 맞추어 반응하게 되고, 결국 학습에 흥미를 잃고 높은 성적을 받지 못합니다. 교사들은 ‘내 추측이 옳았다.’라고 여기죠. 그래서 매번 그 소년에게는 도전적인 과제를 주지 않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기대감을 갖지 않습니다. 

 

매번 이 소년은 무력하거나 불필요한 학생으로 더욱 낙인 찍힙니다. 소년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교사들의 반응을 힘없이 받아들이고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소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재평가하게 해서 타인들이 그에 대한 기대를 바꿀 수 있도록 충분한 변화를 유발하는 정보가 있다면(나는 공부는 못하지만, 춤은 잘 춘다. 집은 가난하지만 눈치가 빠르다. 유머감각이 뛰어나다. 등) 그것을 적극 활용하고 발굴하는 거죠.

 

사람들은 나를 안 좋아해, 라는 미래에 대한 상(像)을 내부에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안 좋아하게끔 무의식적으로 본인이 먼저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를 ‘선수 친다.’라고 하죠. 

 

아무튼 아들러와 융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과거가 아닌, 우리가 미래에 무엇을 하기를 열망하는가에 의해 달라진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해왔던 것보다, 우리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거죠.

 

그래서 제 수첩에는 융과 아들러의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답니다.

 

 

 

 

 

나의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실현에 대한 이야기이다. 

Carl Gustav Jung

 

 

 

 

 

지금의 혼란스러운 마음은, 

균형을 잡기 위한 과정이다. 

Alfred Ad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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