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피서]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올 여름은 유독 덥네요. 요즘은 작업실에서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으며 유유자적하게 보냅니다. 아, 이렇게 여유롭게 살아도 되나? 싶다가 “자유가 과분한 것은 되지 말아야지.”라는 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봅니다. ㅎㅎ


요즘 주변 사람들을 보면 럭셔리 호텔을 하나 잡아서 여름휴가를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게 보내기도 하고, 에어콘 빵빵하게 나오는 만화방에서 죽 치고 앉아 있기도 하고... 더운데 고생하며 돌아다니기보다는 얌전히 방콕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저는 더울 때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년~1958년)의 그림을 봅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느낌이 들어요.


눈길(La route sous la neige) 1931, oil on canvas, 81 x 100.5cm


표현 방식은 야수파답게 이글이글 끓어오르는데, 주요 소재로 눈이 많아서 작업실 벽면에 그의 그림을 붙여 놓으면 여름 피서 그림으로 딱이죠.


블라맹크는 원래 화가가 아니었다고 해요. 그림에 몰두하기 전에는 바이올린 연주자, 자전거 경주 선수, 군인, 엔지니어, 소설가 등 이채로운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요즘 한가람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이 전시 중인데요. 작품들 옆에는 그가 쓴 글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서 그의 독창적인 생각을 읽어나가는 재미도 쏠쏠하게 있습니다.



겨울 마을의 거리(Rue de village en hiver), 1928-30, oil on canvas, 60 x 73cm



눈 덮인 마을(Village sous la neige), 1935-36, oil on canvas, 54.5 x 65cm


그가 유독 겨울 풍경을 많이 그린 이유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말하네요.


자연은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본질을 드러낸다. 

여름에는 푸르른 초목의 무성한 잎, 

잡목의 무성한 새싹들이 

서로 그 모습을 보여주지만 

겨울에는 대지의 기복을 감추고 

그 존재의 이유를 내면에 담는다.


_ 《풍경과 사람》, p 191


그의 말처럼 사람도 자연도 추운 겨울이 되어야 본질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다 가지 치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조차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그 사람 내공이겠죠. 에리히 프롬은 "만약 나의 소유가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라고 묻습니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블라맹크와 에리히 프롬은 서로 세계관이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두 분을 알고 있다면 소개를 해 주고 싶을 정도로, 만나면 서로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습니다. ㅎㅎ




  partie de campagne was painted in 1905


블라맹크는 초기에 고흐와 세잔의 영향을 받아 원색의 밝은 색조로 점과 곡선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는데요. 이 시기의 그림들은 굉장히 강렬하고 격정적이죠. 그런데 1918년부터는 새로운 사실주의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만의 작품 세계가 정립되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화가라면, 

단순하게 너 자신이 내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바라보아라.


_ 《오늘날의 기록》, 그림에 대한 서신, 1921년 1월





내 그림이 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내가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겨울 혹은 여름 풍경, 정물, 빵 조각, 

테이블 위의 물병, 꽃다발들을 그려도 

“이것은 내 것이야."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_ 《화환》, 1936-38




나는 전혀 일을 하는 것이라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림을 그릴 뿐이다.

내게 주어진 재능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다시 되돌려주려 노력했다.

나는 내 장점과 단점에 관계없이 

경험한 나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미술관에 있는 것을 따라 그리는, 

교과서적인 형상들로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_ 《감자가 있는 정물》, 1942-43



브르타뉴 어선의 귀환(Retour de pêche. Bretagne), 1947, oil on canvas, 60 x 73cm


이후에 블라맹크는 캔퍼스 위에 직접 물감을 짜서 채색함으로써 그만의 기법을 만들었습니다.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난 그의 과감한 도전은 새로운 작품세계를 만들었죠. 겨울 풍경 시리즈를 비롯해서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풍성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독특했던 건 미디어 아트와 결합한 점이었는요. 좌,우, 정면과 바닥이 모두 스크린 화면으로 되어 있어 직접 작품 안을 걸어볼 수 있는 체험도 할 수 있답니다. 잠깐 볼까요?




그의 작품을 보면 강한 콘트라스트로 대비를 줘서 어둠과 빛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어둡고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고요한 느낌도 있습니다. 저는 그가 어둠과 빛의 세계를 한 쪽으로 밀어내거나 지워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의 유언을 통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난 아무것도 원한 것이 없었다. 

인생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으며, 

내가 본 것을 그렸다.

_ Maurice de Vlaminck 유언 중


           Maurice de Vlaminck: Still life with fish 



블라맹크는 그림도 사상도 매력 넘치는 아티스트인 것 같습니다. 왜 제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 고인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생에 환생해서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봅니다. ㅎㅎ


아무튼 여름 피서로는 미술관과 영화관이 최고인 것 같아요. 아직 전시 중이니, 블라맹크의 그림들로 무더위를 잊어보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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