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은 지금, 여기




방금 올린 유튜브 영상은 9월 20일에 만든 것인데, 이제야 편집을 좀 해서 올리게 되네요. 이 영상을 만들 때만 해도 제가 보름 가까이 어머니랑 병원에 있을 줄은 몰랐네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는 가늠하고 있지 못하듯이요. 


어머니는 무사히 퇴원을 하셨고(걱정해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그간 하던 일을 손 놓고 돌아오니 일상이 새롭게 보이네요. 가족과 번갈아 가며 간호를 했는데도 강아지와 산책할 짬을 내기도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병원에서 와이파이가 안 되어서 그간 쟁여 놓고 못 읽은 책들을 실컷 읽다가 왔지만, 기분이 묘하네요. 정신 차려 보니 10월 중순이랄까요. 


왜 그런 전래동화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어느 나뭇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산신령을 만났다. 산신령과 바둑 한 번 두고 내려왔는데, 지상에서의 시간이 훌쩍 지나 있어서 살던 동네는 사라지고.... 뭐 이런 ^^ 


내적조절력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저는 계획이란 게 그냥 에고(ego)가 자기 불안을 감소시키고자 만든 귀여운 방탄복쯤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이 방탄복도 꽤 요긴하게 쓸모가 있죠. 충분히 행복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뭐랄까. 내가(에고가) 그리는 밑그림과 우주가(참나가) 그리는 밑그림은 일치할 때도 있고, 어긋날 때도 있지만 질적인 깊이와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  


이 글을 보시는 분도 한 번 성찰해 보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되어져 왔는지. 만약 그래왔다면 그게 내가 꼭 그렇게 계획하고 유추하던 방식대로 딱 맞춰서 풀렸는지? 제가 인터뷰했던 분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이야기가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나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몇몇 인상 깊은 인터뷰이의 말들은 에고의 볼륨을 줄일 때 참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음, 말이 좀 어려울까요? 그러니까 에고의 막을 걷어내고 뭔가 사람이 가장 순수해질 때 절묘한 직관의 눈이 뜨이면서 신선한 아이디어, 올바른 길에 대한 눈이 열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더 비우고, 좀 더 사티어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예전에 제가 블로그에 쓴 것 같은데요. 생각난 김에 다시 한 번 가져와 볼게요.




<다섯 가지 자유>


그래야만 하는 , 그랬던

앞으로 그렇게 대신에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을 있는 자유


느끼고 생각해야만 하는 대신에


지금 느끼고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할 있는 자유


느껴야만 하는 것을 느끼는 대신에


지금 느껴지는 그대로 느낄 있는 자유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허락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에 


원하는 것을 요구할 있는 자유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안전함만을 선택하는 대신에


자기를 위해서 모험을 있는 자유



[Satir et al.(1991). 한국버지니아사티어연구회 (2000).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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