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포항에서 5.4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서 수능이 연기 됐었죠.
누구나 심각한 외상 사건을 겪으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습니다.
요즘 위기개입 수업을 듣고 있어서 그런지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더라고요.
“지진이나 태풍, 홍수처럼 자연에게서 받은 피해로 인한 스트레스가 클까? 아님 교통사고, 살인, 강간, 사기처럼 사람에게서 받은 피해로 인한 스트레스가 더 클까?”
PTSD에 대한 연구 결과, 자연재해와 인재 중, 사람이 만들어낸 외상이 훨씬 더 많은 PTSD의 희생자를 만들어냈는데요.(Figley, 1985a, pp:400~401)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이 만들어낸 외상 사건이 특히 더 파괴적인 것은 인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거죠. 즉 도덕적 기준(가해자가 그러지 않았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Figley, 1985)
PTSD를 공부하다 보면 사람은 ‘인과’를 찾지 못하면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즉 어떻게, 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외상 사건이 발생하면 심리적인 위기가 뒤따르게 되는데요.
PTSD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외상 사건에 대해서 스스로 그 사건을 재조직하고 분류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자기 내부에서 스스로가 정리가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Furst, 1978)
PTSD까지 가지 않더라도 누구나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중간에 일이 꼬일 때가 있죠?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머릿속에는 아까 해결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어서...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이 안 되는 겁니다.
이러한 심리적 찜찜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인데요. 머릿속에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은 사건이 정리가 되지 않으면, 당면한 과제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뇌가 자꾸 소맷자락을 잡아당기기 때문입니다.
내일이면 월요일의 시작이죠. 지금 블로그 글을 쓰고 있지만, 할 일을 떠올리니 머리 위에 까마귀들이 날아다닙니다. 어제 그제 못 만난 지인들을 만나며 회포를 풀었더니,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겨울옷도 정리해야 하고, 공개슈퍼비전 축어록도 풀어야 하고, 센터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하고, 논문 주제도 바꿔야 하고, 낼 일어나자마자 강아지 산책도 시켜야 하고,,,
Richard K. James가 쓴 《Crisis Intervention Strategies》에 보면 뎃 벤자민이란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메릴란드 주 볼티모어 출신의 벤자민은 전쟁으로 인해 극도의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해요.
그는 그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이 저처럼 일요일 밤, 살짝 과부하가 걸린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옮겨 적어봅니다. :)
“1945년 4월, 나는 극심한 오뇌 끝에 ‘경련성 횡단결장’이라 불리는 중병에 걸렸다. 만일 그 무렵 전쟁이 끝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는 보병 94사단 소속의 전상병 기록계의 하사관으로 근무했다. 나의 임무는 전사한 사람, 행방 불명된 사람, 병원에 후송된 사람들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또 적과 아군을 가릴 것 없이 서둘러 대충 매장된 시체를 파내는 일도 거들어야만 했다.
또한 전사자들의 유품을 모아 유가족에게 보냈다. 나는 유품들이 서로 뒤바뀌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했다. 나는 나의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 아직 소식으로만 들은 생후 16개월 된 내 젖먹이를 안아볼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런 걱정 때문에 체중이 34파운드나 줄었고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었다.
나는 두렵고 기진맥진해서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마음이 약해져서 혼자 있기만 하면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그 불안감은 군 진료소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느 군의관의 말이 일생을 바꿔 준 것이다. 그는 정중하게 나를 진찰한 후, 내 병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말했다.
“군 생활을 모래시계라고 생각하게. 모래시계의 맨 위에는 수없는 모래알들이 반짝이고 있고 그것은 느릿느릿, 그리고 일정하게 중앙에 있는 좁은 관을 통과한다네. 만일 한 알 이상을 억지로 통과시키려고 하면 시계는 고장나고 말지. 우리들은 이 모래 시계와 같은 운명일세.
아침에 생각할 때는 그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느껴지지. 그러나 그것을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차례를 두고 해 나가게. 만약 불안함으로 해치우기에 급급하다 보면 마치 두 알 이상의 모래를 통과시킨 모래시계처럼 우리들의 육체도 파괴되고 만다네.”
나는 이후 줄곧 이 잊지 못할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한 번에 한 알의 모래…… 한 번에 한 가지의 일.
결국 나는 전쟁 중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구원 받았으며, 현재 인쇄 회사의 선전, 광고 부장으로 있다. 그리고 일자리에서도 그 격언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 이곳은 마치 전장처럼 바쁘게 돌아간다. 재고의 부족, 신기술의 도입, 거래처 명부 개정, 지점 개폐 등등.
그러나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군의관이 말했던 ‘한 번에 한 알의 모래, 한 번에 한 가지의 일’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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