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는 꽤 오래 만나 온 내담자입니다. P와의 마지막 회기를 마치고 센터를 나오는데, 갑자기 가슴 속으로 슥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이 친구로부터 외려 제가 더 많이 배운 것도 같아요.
P : "샘, 저는 가족들이 미우면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마이너스 상상법을 써요."
ireugo : "마이너스 상상법?"
P : "그러니까, 이런 거죠. 엄마가 또 그 아저씨랑 바람이 나서 집 나가면, 이렇게 상상하는 거예요. 엄마는 시한부 인생이다. 앞으로 3개월밖에 못 산다. 3개월밖에 못 사는데, 뭐 어쩌겠어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요. 그리고 남동생이 또 사고쳐서 학교에서 오라고 하면 이렇게 상상해요. 남동생은 지능이 많이 떨어지는 지적장애가 있다. 지적장애가 있는데 뭐 어쩌나. 내가 이해해야지.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확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우울할 땐 이렇게 상상해요. 아, 나는 눈이 안 보인다. 숨 쉴 때마다 온몸이 아픈 희귀병에 걸린 환자다. 게다가 다리도 한 쪽 없어서 치마도 못 입는다. 이렇게 마이너스 상상법을 쓰면요, 갑자기 엄마도 안 밉고 남동생도 안 밉고 나도 안 미워요. 봐요. 샘! 이렇게 눈도 보이고 두 다리 건강해서 치마도 입고 왔잖아요."
그때 둘이서 한참 깔깔 웃었는데요, 이렇게 멋진 상상력과 굳건한 자아 강도를 가진 사람이 어디 흔한가요? 그때 P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줬었는데요.
ireugo : 건강한 부모 밑에서 질 높은 애착 관계를 형성해서, 잘 자라는 것보다 더 멋진 게 뭔지 알아? 엉망진창인 부모 밑에서 자라더라도 내가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고 응원하고 지지하면서, 그 결핍 있는 애착 관계에서 너만의 멋진 개성 있는 꽃을 피워내는 거야. 너는 내가 만난 내담자 중에 최고야.
저는 P가 잘 해나가리라 믿어요.
오늘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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