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적 이득(secondary gain)]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내담자들을 보면 라포(상담자와의 상호 신뢰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는, 표면적인 이슈를 꺼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잠이 안 오고, 마음이 불안해서 왔다.”라고 하지만... 6회기 정도 넘어가서야 비로소 “남편이 나를 지속적으로 폭행해 왔다.”라고 진짜 이슈를 말합니다.


반면에 첫 회기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잘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내담자는 “저는 유치원 때부터 왕따를 당해 왔어요. 그때부터 우울증이 있었고요.”라며 아무렇지 않게 마치 명함 한 장 건네듯이 자기 이야기를 꺼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확 오픈하면 당황하기도 했는데요. 가만히 보면 이차적 이득(secondary gain)이 있기 때문이란 걸 느낍니다. secondary gain이란 우리가 역기능적 행동을 할 때, 표면적으로는 “그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라고 하면서도 사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마음이 없을 때, 그 안에 숨어 있는 ‘이득’을 말하는데요.


예를 들어 우울증이 있다고 할 때, “그래, 침대에만 있지 말고 이젠 세상 밖으로 나가야지.”하면서도 사실 secondary gain을 살펴보면 “아, 이렇게 있으니까 좋네. 세상과도 단절되어 있고. 이런 고립감 좋다. 내가 우울해하니까 가족이 날 챙겨주기도 하네.”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기도 합니다. 


아이가 계속 말썽을 피우는 역기능적 행동을  할 때, 표면적으로는 그냥 말썽쟁이에 문제아처럼 보이지만, “어, 내가 말썽 피우니까... 맨날 싸우던 우리 엄마 아빠가 한 팀이 되어서 나를 찾으러 다니네.” “형아만 챙기던 엄마가 나한테 관심을 갖네.” 등 복합적인 secondary gain이 숨어 있다는 거죠. 


이렇게 첫 회기에서 자신의 상처를 명함처럼 건네는 내담자들을 보면 “난 희생자야.”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거든요.”라는 자기 보호 시그널을 먼저 상담자에게 보내고 있는 거죠. 진짜 속내는 “나는 그것이 너무 오래된 속옷 같은 거라서, 그것은 사실 나의 맨 살갗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 벗을 마음이 없다.”인 경우가 꽤 있는데요.


요즘 위기상담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왜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면서 같이 사는 걸까?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아니면 낮은 자존감 때문에? 아이가 있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이 들었는데요.


결국 역기능적인 secondary gain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느낍니다. 예를 들어 각각의 파트너가(특히 어릴 때 부모와 애착 형성이 잘 안 되어서, 관계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경우) 굉장히 불안해하는 경우는 배우자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서로를 통제할 방법을 찾게 되는데요. 그 방법 중 하나가 폭력 겁니다. 왜 어떤 여성은 폭력적인 배우자와 계속 동거하거나, 헤어져 있다가도 다시 돌아가는지 그 이유를 말해 주는데요. 결국 이 가정에서 ‘폭력’이란 둘을 묶어 주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Bowlby, 1980; Brewster; 2002; Sonkin & Dutton, 2003)


가족 내의 역기능적인 secondary gain이 그 가족을 유지하게 하는 경우는 다양한 장면에서 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아이가 아픈 경우, 그 아이를 매개로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돌보다가, 아이가 세상을 떠나자, 갑자기 알 수 없는 공허감(부부에게 secondary gain은 아픈 아이로 인해 엮어진 서로에 대한 유대감이었던 거죠.)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둘은 사랑하지 않지만, 아이의 질병으로 인한 유대감(secondary gain)이 둘의 결혼 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거죠.


사실 누구나 secondary gain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소싯적에 인터넷 중독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천리안의 ‘크낙새’로 활동하면서 특히 ‘끝말잇기’ 방에서 높은 포인트를 기록하며 승승장구 했습니다. ㅎㅎ 과제도 안 하고, 빨래도 안 하고, 청소도 안 하면서 자취방에 오면 무조건 인터넷 접속부터 하는 겁니다. 머리로는 “아, 내가 또 접속하면,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 있는 거죠.


그때 저의 secondary gain은 외로움에 대한 ‘정서적 충족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끝말잇기방에서 함께 활동했던 황금사다리님 조르바님 99%님... 다 생각이 납니다. 다들 뭔가 공허함에 그러고 앉아서 끝말잇기방에서 활동했던 것 같은데요. ㅎㅎ


만약 과거의 저를 만나면 일단 secondary gain이 갖는 ‘이점’에 대해서 일단은 충분히 ‘허용’해 줄 것 같아요. 그에 대한 양가감정(벗어나고 싶지만, 사실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해서도 충분히 ‘수용’해 줄 것 같습니다. ‘아, 너 참 외로웠구나. 너한테 인터넷 중독은 마음의 쿠션 같은 거였구나.’라며 그런 secondary gain에 대해 충분히 공감해 주고 허용해 주는 거죠. 


그 다음에 대안적인 행동을 ‘작은 것부터’ (집에 오기 전에 아예 도서관에서 과제를 다 끝내고 돌아온다든지, 오프라인에서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귄다든지, 집에 있는 컴퓨터를 없애버리고 학교 컴퓨터를 이용한다든지 등등) 실천해 나가는 거죠. 


결국 secondary gain에 대한 태도는 그것에 대한 ‘수용’(오죽하면 그럴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의 충동, 슬픔, 우울, 공격성에 대한 역기능적 이득으로 secondary gain이 만들어졌다는 걸 이해하는 겁니다. 


만약 지금 누군가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다면, ‘학대의 수용’이 아닌, 내가 학대의 고통 중에 있음을 수용하는 것, 학대를 멈추기 위해 필요한 단계를 밟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수용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죠. 


만일 담배, 알코올, 약물 중독 문제가 있다면, 그것에 대한 충동을 수용하는 것, 그것을 포기하는 데서 오는 상실감을 수용하는 것, 그리고 감정 조절을 위해 그것에 의존하던 것을 중단할 때 나타나는 정서적 고통을 수용할 때 비로소 secondary gain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죠. 


secondary gain을 떠올리면 그리스 신화의 아주 유혹적인 세이렌이 떠오릅니다. 사실 나에게 하등 도움될 게 없는데, 그것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역할(사실은 썩어 있는데!)을 하고 있다는 거죠. 


사실 secondary gain을 살펴보면 그렇게 해야 내가 살 것 같으니까, 그렇게라도 해야 숨 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것을 붙잡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secondary gain 자체는 결국 한 인간을 성장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의 secondary gain에 대해서, 그것에 대한 양가감정에 대해서 충분히 허용해 주되, 거기에 파묻혀 있는 나를(그것이 아무리 달콤하더라도, 그렇게라도 해야 내가 살 것 같더라도) 일으켜 세워서 ‘아주 작은 한 걸음’(작지만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대안 행동)이라도 내딛을 때 변화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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