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 왜 자꾸 생각이 나지?


요즘 한 내담자를 만나고 있는데요. 이 분의 이슈는 과거에 속상했던 일들이 수시로 떠올라, 필름처럼 펼쳐져서 괴롭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반추(과거에 있었던 일을 되새김질하는 것) 때문에 힘들어했는데요. 유독 과거의 삽화 중에서 우울하고 속상했던 기억만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내담자 보호 차원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문득 슈워츠와 블레스(N. Schwarz&Bless)가 언급한 정서의 정보 모델(Affect-as-Information Model)이 떠올랐습니다.


‘정서의 정보 모델’이란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 ‘정서’를 통해(정보로 삼아서) 지난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것을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 중에서 유쾌했던 일이 더 잘 떠오릅니다. 


반대로 슬플 때는 슬펐던 일들이 더 잘 생각납니다. 슬픈 기분일 때는 집 앞 놀이터에서 가족과 즐겁게 배드민턴을 쳤던 추억조차 슬프게 느껴집니다. 놀랍거나 무서울 때는 유독 불안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화가 났을 때는 과거에 화가 났던 일들이 더 잘 떠오릅니다. (Levine & Pizarro, 2004).


영화 <곡성> 보셨나요? 지금도 생생한 게 장독대를 깨뜨리니, 죽어 있는 까마귀가 나와서 퍼덕거리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영화관에서 갑자기 앞에 앉은 어떤 여성 분이 “꺄아아악!”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저는 영화 장면보다 그 괴성을 듣고 더 깜짝 놀랐는데요.


아무튼 영화를 다 보고 밤에 나오는데 온통 주위가 청회색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상하게 싸~한 기분이 들면서 왠지 전봇대 밑에 귀신이 앉아 있을 것만 같은 오싹함이 들더라고요..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범죄심리를 전공하는 한 선생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보통 우리가 밤에 음습하고 어두컴컴한 숲을 보면 “아, 무서워.”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범죄심리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대요. “오호라. 여기 시체 숨기기 딱 좋은데?”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그 분이 이야기 해 준 이러저러한 무서운 이야기들이 자꾸만 생각나면서,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게 너무 무서운 거죠. 길 가는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왜... 왜 날 쳐다보지?” 하면서 오싹하구요.


아무튼 그날 <곡성>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친구랑 맛있는 저녁을 먹고 예쁜 원피스도 하나 지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영화관에 들어간 거였으니까요. 


하지만 <곡성>을 본 뒤에는 정서가 청회색으로 바뀐 겁니다. 제 감정의 크레파스 색깔이 확 바뀐 거죠. 그러니 뭘 생각해도 오싹하고, 더불어 과거에 무서웠던 기억이 자꾸 생각나는 겁니다.


정서와 기억 인출에 관한 연구를 보면, 같은 길을 걸어도 기분이 좋을 때는 햇빛, 나무, 새소리,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누군가 차를 망가뜨려서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을 때는 나무, 새, 사람들의 웃음 등이 눈에 띄지 않고요. 대신 거리의 잡동사니들, 뚜껑을 덮지 않은 쓰레기통의 냄새, 교통 소음이 귀에 쏙 들어온다고요.


이 모든 게 ‘정서’가 일종의 포커싱(주의 집중)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요. 특히 부정적 정서는 우리의 시야를 좁힙니다. 그래서 좀 더 세밀한 데 집중하게 하고요. 장점이 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에서 불편한 포인트를 더 잘 잡아내죠.


반면에 긍정적 정서는 환경을 더 잘 파악하고 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주의 초점을 확장합니다.(Bolte et al., 2003;Fredrickson & Braniga, 2005; Fredrickson & Joiner, 2002)


하지만 긍정적 정서를 갖고 있어도, 어떤 강한 목적 의식(저걸 꼭 이뤄야겠다. 저걸 가져야겠다 등등...)이 들면 주의 폭을 좁혀서 세부 사항에 주목하게 한다네요.


부적 정서와 긍정 정서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써 볼게요. 


아무튼 정서가 갖는 영향력 중 하나는 기억 강도를 증진하는 데 있습니다. 유독 불쾌하거나 혹은 행복할 때는 그때의 삽화가 뇌리에 강렬하게 남는다고요. 벽에 쓰여진 많은 글자들 중에서 ‘kill’ 같은 단어를 좀 더 잘 기억하는 데에는 그 단어가 강렬한 정서를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사라졌는데, 인사동에 ‘운모하’라는 까페가 있었거든요. 그 까페가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하루는 거기서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제 인생 최악의 인터뷰이를 만났습니다. 아무튼 그때 그 분으로 인해서 굉장히 기분이 나빴는데요. 그 이후로는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가도 그 공간만 가면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그곳에 가기가 싫은 거죠.


이처럼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건들은 강렬한 정서를 동반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생생하게 남아 그때의 기억을 향상시킵니다. (Abercrombie, Kalin, Thurow, Rosenkranz, & Davidson, 2003).


심리학자들은 이처럼 정서가 포함된 생생하고 매우 자세한 기억을 섬광기억(flashbulb memory)이라고 하는데요. 섬광 기억은 매우 생생해서 그때로 돌아가 다시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재밌는 건 우리는 정서를 배경지 삼아서 과거를 선택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때로는 실제보다 더 장밋빛으로 기억하기도 한다고요. 한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봄방학 여행에 PDA를 가지고 가도록 했대요. 그 PDA는 매일 7번 예측 불가능한 시간에 신호를 울려서 학생들이 그 순간의 정서를 보고하도록 했는데요. 여행을 다녀온 후 얼마나 즐거웠는지에 대해 물었더니 학생들이 중간, 중간에 보고한 즐거움의 평균값보다 결과값이 상당히 높았다고 해요. (Wirtz, Kruger, Scollon, & Diener, 2003). 즉 어떤 경험에 대한 기억은 전체 시간 동안의 평균이 아니라 몇 개의 가장 좋았던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거죠.


그러고 보면 인생도 하나도 필름이라면, 강렬한 정서를 동반한 몇 개의 삽화가 행복하다면 인생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 삽화가 굉장히 슬펐다면 내 인생이 슬펐다고 사람들이 인지하는 것일까? 등등... 여러 가지 물음도 생기네요. 


그런데 강렬한 정서는 왜 기억력을 강화하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우리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일수록 더 생생히 기억해야 무엇 때문에 위험해졌는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 어떤 사람이 도움이 되거나 해가 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야 향후 중요한 사건을 예측할 수 있고, 추후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응할 수 있게 하니까요.


아무튼 말이죠. 요즘 들어서 자꾸 과거에 우울했던 기억이 불쑥 생각나서 속상하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아, 내가 지금 우울해서 과거에 우울했던 기억만 낚싯대로 건져내고 있구나.” 


이럴 땐 대신 내가 잘했던 일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던 일들, 그래도 나름 살아보려고 애썼던 나를 떠올려 보고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시길 바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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