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과 해석] 당신 속 나에게





며칠 전에 한 아주머니가 저희 어머니를 붙들고 한탄했습니다. 아들이 이번에 수능을 망쳐서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네 엄마들이 "00이는 K 대학에 갔다면서?"라고 말하는데 왠지 모르게 무시하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구요. (저는 속으로 K 대학 정도면 서울에 있고, 뭐 나쁘지 않은데, 왜 그럴까? 갸웃거렸습니다. 제가 예전에 과외했던 학생은 K 대학이라도 붙었으면 했거든요.)


더군다나 아들 친구 P는 명문대에 떡하니 붙었답니다. 게다가 P 엄마가 “아휴, K 대학 붙은 것도 잘한 거야.”라고 말하는데, 더 화가 나더랍니다. P는 명문대 붙어 놓곤 그렇게 말한다는 거죠.


그 말이 다 진실이라고 쳐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보다 아들이 K 대학에 들어간 걸 무시하고 못 견뎌하는 건 아주머니 본인이 아닐까 하고요. 


맹자는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자신을 업신여긴 후에야 남들이 그를 업신여기고,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훼손한 후에야 남들이 그 집안을 훼손하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토벌당할 지경에 이른 후에야 남들이 토벌하는 것이다.(이루 상, 7-8-4)”라고 말했습니다.


게슈탈트 심리치료에서도 우리가 느끼는 감정, 그리고 욕구와 행동이 외부의 영향을 받더라도 결국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는 걸 자각하고 이해하는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즉, 좋든 싫든 삶은 우리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더 이상 쓸모없는 투쟁에 빠지지 않는다는 거죠. 


만약에 아주머니가 아들이 K 대학에 들어간 것에 대해 그렇게 상심하거나 창피해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면 주변에서 “K 대학 갔어요?”라는 반응에 대해 “K 대학밖에 못 갔어요?”라고 부풀려서 받아들이지 않고 “K 대학 붙은 것도 잘한 거야.”라는 말에 ‘그래, 뭐 잘한 건 아니더라도 나쁘진 않지.’ 정도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죠.


이런 과잉 투사는 평소에도 자주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어느 피곤한 날에 지하철을 타고 내리다가 불특정 다수와 어깨를 부딪혔는데, 꼭 일부러 내게 그런 것 같아서 화가 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증폭되어 산다는 건 냉혹하고... 그러한 생각이 확장되어 인간관계로까지 뻗어나가더니 그래, 이해관계가 없어지면 멀어지는 게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런데 말이죠.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거나,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다면... 설사 지하철을 타고 내리다가 어깨를 부딪혀도(좀 불쾌하긴 해도) 뭐 그런갑다, 하고 내 갈 길 가지... 일부러 내게 그랬다든지 세상이 차갑다든지... 이해관계가 뒤틀리면 멀어지는 게 사람이라는 생각으로까지 뻗어나가진 않을 겁니다. 


심리치료사 클라크손(Petruska Clarkson)은 세상이 유독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내 안에 공격성을 억눌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공격성을 억압하고 잘 접촉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를 타인에게 투사해버린다는 거죠. 그래서 세상이 공격적으로 느껴집니다. 내 안에 차가움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유독 차갑게 느껴지고 내 안에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의해서만 인간관계가 형성된다고 믿는 거죠.


클라크손은 우리에게 이런 투사적 관점은 긍정적인 측면과 관련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자기 안에 있는 좋은 점인데 충분히 발달하거나 개발되지 못했거나, 있으면서도 잘 접촉되지 않는 부분을 타인에게 투사하며 부러워하거나 그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요. 


예전에 아는 동생이 “누나. 그때 누나 잡지에 글 쓰셨던 분이요. 저 좀 소개시켜 주면 안 될까요?”라며 연락을 해 왔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그 분 책을 우연히 읽고 완전히 감동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마침 그 분이 작은 음악회를 한다고 해서 그 동생을 데리고 갔습니다. 서로 소개를 시키고는 저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그 동생이 “누나, 그때 그 분이요. 생각보다 별로였어요.”라고 말하는 겁니다. 


융과 징커는 우리에겐 재밌는 속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안에 가장 좋은 부분을 상대에게 투사한 다음 쫓아다니는 거죠. 이때 상대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투사한 지점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관계는 얼마 못 가서 실망하게 된다고요. 따라서 건전한 대인관계를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내적 측면과 충분히 접촉한 다음 통합하는 게 필요합니다. (Jung, 1964, 1983; , 1977).


그럼 이런 투사의 지점을 알아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클라크손은 내담자에게 주어를 한번 바꾸어 뒤집기를 권합니다. 예를 들어 내담자가 어떤 사람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말하면, 거꾸로 자신이 스스로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거죠.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무시와 증오에 접촉할 수 있게 되면 자기 안의 억압자의 목소리를 자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잠깐 써 보고 넘어갈까요?



1. 상대가 나를 화나게 했던 상황을 문장으로 써 봅니다. 



2. 상대를 ‘나’로 주어를 바꿔 다시 써 본 다음에 통찰해 봅니다. 




예를 들어서 


00은 내가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있다.

---> ‘나는’ 내가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있다.


이르고는 내가 대머리라서 싫어한다.

---> ‘나는’ 내가 대머리라서 싫다.


그는 내가 그럴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 '나는' 내가 그럴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투사에 대해서도 잠깐 써 보고 넘어갈까요?


1. 부러워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의 어떤 면이 좋나요?


2. 그 사람을 ‘나는’이라는 주어로 바꾸어 통찰해 봅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요. 


00이가 명확한 의견을 잘 내놓아서 좋다.

->나는 명확한 의견을 잘 내놓는 게 좋다.


철수는 사람이 씩씩하고 호방해서 좋아.

->나는 내가 씩씩하고 호방한 게 좋아.


그의 통찰력이 마음에 들어.

->나의 통찰력이 마음에 들어.



해 보시니 어떤가요? 요즘 대학원 선생님들이랑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서로 돌리고 있는데, 주어 바꾸기를 통해 통찰이 많이 일어난 것 같아요.


주어 바꾸기를 통해, 가장 나쁜 것도 가장 좋은 것도... 설사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내 안에서 파생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반추의 사슬을 끊고 조금은 홀가분해질 수 있을 거라 믿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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