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마음의 탄력] 사람이 생기 있을 땐 언제일까? (3)


저는 매슬로(Abraham Maslow)가 천재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분은 표면적인 차원에서 어떤 현상을 보는 게 아니라, ‘더 잘하고 싶어 하고’ ‘더 성장하길’ 바라는데,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불가피하게 따르는 결핍을 ‘사랑의 눈’으로 통찰해 냅니다. 


예를 들어서 품행 장애 아이를 보았을 때 보통은 “그 애는 왜 비행을 저지를까?” 이런 병리적인 관점에서 이유를 분석하는데요. 


매슬로는 아이의 비행을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아이가 그렇게 비행을 저지르는 데에는 부모 혹은 환경의 착취, 지배, 무관심, 경멸, 무시에 대해 자기 나름으로 ‘저항’하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한 사람의 성격적 문제누군가 이 사람의 심리적 뼈대와 내적 본성을 파괴하고자 할 때 이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파괴가 발생할 때는 이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병적이라는 거죠.


이런 상황을 그저 참고 견디기만 하면 몇 년 후 다양한 형태의 신경증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요. 내담자의 병리적인 증상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튀어나온다는 게 매슬로의 관점입니다.


불안, 강박, 우울... 다 무의식적 저항이라는 거죠. 이 모든 게 심리적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과정입니다. 살기 위해서 저항했는데, 그 방식이 역기능적으로 비어져 나온 거죠.


공부를 할수록 저항이 정말 귀한 에너지구나, 하는 걸 여실히 느끼는데요. 제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저항 속의 숨은 가능성입니다. 저항이 클수록, 에너지가 크다는 거고, 잠재적인 가능성도 더 크다는 걸 느끼는데요.


저는 학창시절에도, 직장 생활하면서도 위에 대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윗분이 뭘 시키면 저항하지 않고 어느 선에서 적절히 처리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새삼 요즘 들어서 저항을 하고 있는데요. 어느 날 윗분이 뭘 시켰는데, “못 하겠습니다.”라고 용기내어 거절했습니다. 옆에 있던 박사샘이 “샘, 나중을 생각해서 줄을 잘 서야지. 왜 그래?”라고 타박하길래 “선생님이나 줄 잘 잡으세요.” 하고 그 모임을 때려치우고 나왔는데요.


얼마 전에는 선배 소개로 간 어느 센터에서 말도 안 되는 걸 자꾸 시키길래 “안 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당신 말고도 할 사람 많으니 그만하라고 하더라고요. “네, 안녕히 계세요.”라고 나와 버렸습니다.

“저는 상담업계의 폐쇄성이 싫으네요. 그냥 제가 하나 꾸려 볼까 봐요.”라고 하니까 주변에서 “샘, 그냥 센터에나 있어.”라고 말리길래 “이렇게 그냥 주어진 틀에만 안주하니까 대우가 이 모양인 거죠. 이렇게만 있지 말고, 개척을 같이 해요.”라며 저항했는데요.


요즘 들어서 왜 이렇게 저항이 늘었을까? 하고 멘토에게 여쭈었더니 “그만큼 내적 힘이 생긴 거지. 난 자기한테, 남들한테는 없는 지점이 보여서 좋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는 병리적인 사람만 상담받는 게 아니라 예방차원에서 누구나 잠재적 스트레스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왜 이 업으로 들어섰는지 잘 모르겠지만, 소명 의식이 있는 건 분명하고, 그 소명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이고, 저는 그냥 통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 있습니다. 


상담업계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자격증이 많고, 다들 본인들이 공인 1호라고 주장하고, 그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돈이 흘러가는 시스템을 만들고, 결국 예비 상담자를 고객으로 해서 먹고 사는데요. ㅎㅎ 적당히 타협해서 저도 자격증 3개를 취득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시스템이 싫어졌습니다. 벗어나려고 합니다. 진정성을 갖고 걸어가면 또 새로운 길이 열릴 거라 믿고 싶습니다. 저는 말로 공언하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공언해 봅니다. 


저는 상반기에 ‘마음밑돌’이라는 1인 사업체를 만들어서 기업 프로그램과 강의를 진행할 겁니다. 주변 사람들은 “네가 무슨 사업이냐?”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그간 기업에서 진행한 프로그램 반응이 좋았고 인기도 많았습니다. ㅎㅎ 논문이 끝나면 단행본 작업도 들어가고,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유튜브도 재밌게 만들어 볼겁니다. 차후에는 공간을 빌려서 아카데미식의 세미나 장도 만들어 볼 겁니다. 함께 성장한다는 소명을 갖고요. 


이런 목표들이 제게 저항 의식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거고, 이런 생기는 제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탄력감을 줍니다.


저항이 왜 삶의 생기와 이어지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항이 삶의 도약을 이끄는 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요즘 만나고 있는 내담자가 있는데, 초반에는 방어가 셀 뿐더러 눈치를 엄청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랑 라포가 형성되고, 내면에 있는 힘을 자꾸 북돋아 주었더니 그제 처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 새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저 많이 때렸어요. 나쁜 사람이에요.”


사방에서 자기를 관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검열하고 단도리하고 두려워하면서 “새엄마도 나름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라고 방어만 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속내를 내보이는 저항이 반가웠습니다. 솔직함에서 치유가 시작되는 거죠. 


우리가 살다가 저항이 일어날 때, 나는 왜 남들처럼 순응하며 살지 못할까, 라며 자책할 때가 있는데요. 사실 저항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무엇보다 뜨거운 힘이니, 반가운 마음으로 그 내적인 힘을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매 맞는 아내가 저항하기 시작했을 때, 학교 폭력을 당하던 아이가 비로소 저항하기 시작했을 때, 불합리한 것에 대해 참기만 하다가 저항하기 시작했을 때 그건 정말로 반가운 심리적 뼈대가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거죠. 영혼 없이 순응만 하던 사람이 저항하기 시작할 때, 두 눈에 생기가 도는 건 비로소 자기 삶의 핸들을 자기가 쥐기 시작했기 때문일 겁니다. 


매슬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장과 자기실현이 저항과 고통과 슬픔, 비탄, 동요 없이 가능한가?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 저항과 고통과 슬픔이 필요하며, 마치 이러한 것들이 늘 나쁜 것인 양 자동적으로 이것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고 그들을 그러한 고통에서 보호하기만 한다면, 성장할 기회를 잃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개인의 존엄성, 내적 본성, 앞으로의 발달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요즘 저는 화가 나거나 불안하거나 짜증이 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 진짜 잘하고 싶었구나.”


끝났다는 마음이 들어서 서글퍼질 때면 “아, 이제 새로운 기회가 오려나 보다.” (이건 주역의 관점에서도 일리 있는 논리입니다.)


실망했거나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알게 되었다. 배웠다.”라고 속삭여 봅니다.


“저 사람 참 싫다.”라는 마음이 올라오면 “오, 저 사람 놀랍다. 진짜 신기하다. 나랑은 다른 생명체다.”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런 변형 어휘들은 매슬로가 말한 성장의지, 긍정의 관점에서 리프레이밍해 본 건데요. 제가 쓰는 셀프토크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있으시면 가져다 쓰시길 바래요.


내적 언어가 갖는 파급력은 굉장하기 때문에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   새해에는 이 글 보시는 분들이 더 많이 웃으시고, 내적인 힘을 갖게 되길 기도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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