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순환성]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예전에 어느 분을 인터뷰했을 때 오프 더 레코드로 "많은 회의가 건성이다. 조직의 명운이나, 국가 정책 관련한 일도 그저 의례적으로 처리된다. 회의자료 준비한 대로 통과되는 수가 부지기수다. 똑똑한 사람들이 뭔가 집단이 되면 아리송해진다."라고 말했는데 <국가부도의 날>을 보면서 그 분 말이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국가부도의 날>에서는 한시현 VS 재정국 차관의 대비로 그려지긴 했지만, 저는 반대급부인 재정국 차관이 그저 한 명의 개인으로 읽히진 않았습니다. 재정국 차관 뒤에는 수많은 이해관계와 연결고리들이 있겠죠. 어쩌면 한 명 한 명이 개인이 되었을 때(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던 나치 대원도 집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에게 피아노 연주를 해 주 자상한 아빠였듯이요.)는 인간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집단적 선택으로 변환되면 이상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죠. 설사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일지라도요.

 

 

이 분이 20세기의 천재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인 애로우(Kenneth Arrow)라는 분인데요. 이렇게 국가의 중대한 일이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그 선택의 열쇠를 쥔 사람들이 집단이 되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과정을 잘 설명해 둔 분입니다.

 

음,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수학여행을 가는데, 제주도와 괌, 그리고 설악산이 대안으로 나왔다고 해 봐요. 일단 제주도냐 설악산을 놓고 투표를 하는데, 설악산보다는 제주도 가고 싶다는 다수의 의견이 많습니다. 이번엔 제주도냐 이냐를 놓고 투표를 했는데, 괌표가 좀 더 나왔습니다. 제주도나 괌이나 여행 비용은 그다지 차이가 안 나는데 그럴 바에는 조금 더 들여서 괌을 가자는 의견이 많았던 거죠. 그래서 이번엔 괌이냐 설악산이냐를 놓고 투표를 하는데,  IMF로 인해서 집안이 어려워졌으니 부모님 시름을 덜어드릴 겸 비용을 절감하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 우리 설악산 가자로 결론이 납니다.

 

애로우는 이렇게 개인이 다수가 되면 '가위 바위 보' 같은 순환에 빠지고 만다고 보았는데요. 이걸 선호의 순환성(cyclicity of preferences)이라고 말합니. 선호체계가 순환되지 않아야, 선택에 혼란이 생기지 않는데 마치 운동경기처럼(한국이 브라질에게 축구를 졌는데, 브라질이 독일에게는 지고, 한국이 독일은 이겼다처럼) 공공선택(public choice)에서 이런 순환성의 오류에 빠질 확률이 높다는 거죠.

 

애로우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의 선호와 기호가 존중되는 시장 자본주의에서, 개개인이 모여 개인의 선호를 합쳐 집단적 혹은 사회적 선호(social preferences)를 구성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개인적인 가치나 선호에 기초해서 사회적 의사결정함수(후생함수)를 도출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나는 이걸 불가능 정리(impossibility theorem)로 정리하고자 한다."

 

국가를 부도로 이끈 것은 각 분야의 '집굴'은 아니었을까 싶네요. 국민들에겐 쉬쉬하고, 키를 가진 집단 얼굴들이 서로 봐 주고, 급한 불 꺼 주고, 네 의견은? 내 의견은? 우리 의견은? 에라 모르겠다, 순환성 오류에 빠져 IMF 구제 금융 신청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싶어요.

 

저희집도 IMF로 피해를 보았고, 당시에 자살률이 42%나 치솟은 건 이런 순환성 오류가 빚어낸 치명적 결과였던 것 같아요. 국가라가는 게 어찌 보면 다수의 얼굴이지만, 책임질 사람 없는 허수아비의 얼굴이었던 거죠.

 

화도 났지만, 앞에 앉은 나이 지긋한 부부가 훌쩍훌쩍는 걸 보니 저도 덩달아 눈물이 나더라고요.

 

저는 경제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상담심리를 공부하다 보니 사람 사는 학문인 경제학과도 많은 연관성이 보이네요. 마침 애로우 아저씨 논문과 책을 들춰보던 참이었는데, 국가부도의 날을 보니 더욱 경제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분들 열연도 돋보였고, 생각할 꺼리들을 던져주는 영화였다고 생각해요. 다만 영화를 만든 의도가 영화를 압도하는 부분이 있어서(주제에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보다는,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나오는 게 좋다고 믿기에) 살짝 평면적으로도 느껴지긴 했지만, 이런 영화가 또 하나쯤은 나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둡지만 빛나는 영화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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