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의 핸들을 쥐고 있을 때] 사람이 생기 있을 때는 언제일까? (2)


내 인생은 망쳐버린 도화지 같아서 돌이킬 수 없다고 믿는 내담자에게 “당신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가 언제였나?”라는 질문을 하면, 표정부터 달라집니다. 아주 소소한 것일지라도 그때의 나를 만나면 온전했던 지점, 좀 더 할 수 있는 지점, 예외적인 지점을 탐색하게 되니까요.


힘들었지만 이때 행복했고, 이런 일이 참 다행이었던 지점을 포착하기 시작하면 어떤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결국 사람은 누가 시켜서 억지로 그것을 할 때가 아니라 자기가 신이 나서 그것을 할 때, 자기 주체성을 가질 때 그것이 의미 있었다는 것을 통찰해 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라면 하나를 끓여도 누가 시켜서 끓일 때보다는 본인이 끓이고 싶어서 끓인 라면이 맛있지 않나요? 이쯤에서 그만 놀고 공부하려고 했는데 누군가 “공부해!!” 이러면 더 하기 싫어지는 건 자기 자율성이 제한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직장 생활할 때부터 (클릭 ☞) 내재적 자율성(내재적 동기)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솔직히 조직에서 자율성을 발휘한다는 건 마술과도 같은 일이죠. 무엇보다 자율성이 무조건 생산성에 기여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자율성이 주어졌을 때, 더 신이 나서 일하는가 하면 의존성이 높은 사람인 경우엔 오히려 자율성이 일의 생산성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율성이 주어졌을 때 주관적인 행복도가 높아졌으며, 의존적인 사람의 경우에도 어떤 통제를 주되, 그 통제의 범위 내에서는 자기 자율성이 주어질 때 일의 능률이 올랐다는 걸 이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Heidemeier, H., & Wiese, B. S. 2014).


제가 가을에 만난 내담자가 있는데요. “위에서는 자꾸 사과를 열 개 깎으라고 한다. 내 능력은 일곱 개인데... 아무리 더는 못 깎는다고 말해도, 일단 해 봐라... 이런 식의 피드백이 온다.”라며 힘들어했습니다. 


이렇게 자율성이 제한된 상황에서는 능동적으로 움직일 동기가 잘 안 생깁니다. 


제가 잡지를 만들 때, 한 디자이너가 있었는데요. 이 친구가 참 똘똘했습니다. 대표 편집장이 디자이너가 잡지 시안을 만들어서 보여 주면 “A도 싫다, B도 싫다, C도 싫다, 다시 찾아 봐.”라고 고개를 내저었죠.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화가 나죠. 나름 열심히 찾아서 시안을 보였는데 다 싫다고 하니 일할 맛이 안 납니다. “어차피 난 자율성이 없으니 대충대충 할래요.” 이런 마인드로 일하는 디자이너가 솔직히 대부분이었는데요.


이 친구는 대표가 좋아하는 스타일,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 대표와 자기 사이에서 합의를 볼 수 있는 적절한 지점의 표지 시안을 찾아 놓은 다음에, 그걸 다시 퀄리티 면에서 上, 中, 下로 만들어 대표에게 下부터 순차적으로 보여 줍니다. ㅎㅎ 대표가 “다시 찾아.”라고 하면 中을 보여주고, 그 다음엔 上을 보여주는 거죠. 


그 친구를 보면서 느낀 게 “어차피 나한테는 자율성이 없으니까 하나 얻어 걸려라.”라고 대충 찾아주며 노동력을 낭비하는 디자이너보다 자기 나름의 자율성을 갖고 융통성 있게 발휘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더라고요. 이 친구가 회사 생활을 다른 디자이너보다 오래하고 나름 신나게 다닌 게 이런 자기만의 소소한 자율성, 자기 주체성에 있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사실 저도 잡지사 다닐 때 인터뷰 기사를 2개씩 쓴 적도 있습니다. 하나는 잡지의 방향성에 맞는 잡지용 기사로, 또 하나는 개인 소장용으로 남겨 두었는데요. 잡지에는 담을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한 지점들을 물어 담은 기사는 지금 읽어봐도 재밌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저는 이렇게 기사를 개인소장용 하나, 매체용으로 따로 쓰면서 나름 자율성을 발휘했고, 그러면서 인터뷰하는 게 점점 재밌어지더라고요. 


빛이 나는 사람들을 보면 직업의 귀천을 떠나서 자기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경향이 많은 것 같아요. 작년 명절에 총장님(팔순 된 여성 분인데, 젊은 제자들과 교류하는 걸 즐깁니다.) 댁에 갔었는데, 저는 이 댁의 입주 도우미 아주머니가 참 멋있었습니다. 할 일을 깔끔하게 끝낸 다음엔 “나 놀다 오겠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 “이건 몸에 안 좋으니 드시지 말라.”며 당당하게 조언하는 모습에서 ‘저 분은 자기 주체성을 가진 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저런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궁금해졌는데 몇 번 만나게 되면서 이 분이 연변에서 왔는데, 어렸을 때 없는 살림에도 엄마가 엄청 당신을 사랑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총장님에게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솔직히 주는 월급만 받고 주어진 일만 할 수 있는데도 “단 거는 몸에 안 좋으니 고만 드시라.” 등등 이런저런 염려와 충고가 있다는 건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는 나오지 않는 거죠.


아무튼 자율성과 주체성의 기반은 세 가지 덕목이 기반이 되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부모와의 건강한 애착관계(정신적으로 충분히 엄마 젖을 먹었을 때 나오는 자존감). 아무래도 부모와 건강한 애착 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도 자기 삶의 핸들을 쥐고 사는 경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둘째는 자기 자신과 상대에 대한 사랑. 위에서 아무리 어쩌고 저쩌고 해도 내가 나를 사랑하고, 상대를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 하면 나도 살리고, 상대도 윈윈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지?”라며 서로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생산성을 높이는 대안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셋째는 어느 정도 꾀도 필요한 듯 싶어요. 적절한 일의 범위를 파악하고, 그 범위 내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거죠. 위에는 “네, 네.” 하더라도 자기 나름의 선을 정하고 그 선 안에서는 자율성을 발휘하는 유연성 말입니다. 똘똘했던 그 디자이너처럼요.


칼 융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이유를 ‘자율성의 침해’에서 찾았습니다. 자기 삶의 핸들을 남에게 다 넘겨주면 그 핸들을 쥔 사람에게 맞추려고 온 신경을 다 쓰기 때문에 자아는 없어지고 정신이 병 든다는 거죠. 그러니 우리 삶에 자율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느끼게 됩니다. 


사람이 생기 있어지려면, 또 어떤 게 필요할까요? 고건 다음 시간에 이어서 써 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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