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찌그러진 나는 에너지의 원천



가끔 인격적으로도 성숙하고, 완벽해 보이는 분을 볼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멋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까운 사람들은 그에게도 연약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심리학자인 융(Carl Gustav Jung)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한(good) 사람이기보다 온전한(whole) 사람이 되고 싶다.”


사회적으로 적응하며 살기 위해 우리는 누구나 ‘페르소나=외부 인격(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자 일을 할 때 만난 분들은 제가 사교성이 좋다고 말합니다. 내담자들은 제가 따뜻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안의 찌그러진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를 마주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지만요. 사교성의 페르소나 뒤에는 사람을 가리고 평가하는 자폐적인 내가 있습니다. 따뜻한 페르소나 뒤에는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내가 있습니다. 대범해 보이는 모습 뒤에는 소심하고 나약한 내가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융은 페르소나 뒤에 숨겨진 그림자(의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나의 얼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는데요. 이러한 열등한 그림자 속에 창조와 성숙의 씨앗이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림자 속에는 그동안 살면서 억눌렀던 인간의 원시적인 힘, 본능, 창조적 충동이 숨겨져 있다고요.


인터뷰를 해 보면 무대체질인 분들일수록 공격성이 강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뭔가 좌중을 압도하는 그 카리스마가 억눌러 둔 공격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랄까요? 융은 공격성이야말로 잘 발현되면 가장 귀하게 쓸 수 있는 힘이라고 봅니다. 내 안의 공격성을 억압하지 않고 하고 있는 일이나, 무대 위에서 잘 발휘하면 반짝반짝 빛날 수 있다고요. 


시샘이나 질투가 강한 사람일수록 남이 놓치는 부분을 잘 보고 포착해내는 능력이 잘 발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스스로가 못 생겼다고 생각할수록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애교나 사교술이 발달하고요. 변덕이 심할수록 타인의 감정을 잘 읽어내고 눈치가 빠릅니다. 융은 우리의 그림자 속에는 그 어둠을 보상할 강렬한 빛의 에너지가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두운 그림자를 직면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 내가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란 처절함 속에서 민낯을 마주해야 하죠. 하지만 이러한 직면은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시키기 위한 소중한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저 사람이 싫어. 때론 정말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마음이 올라오면서도 앞에선 살아남기 위해 “네, 네.” 하고 웃을 수밖에 없을 때, ‘아, 사람을 죽이고 싶다니, 나는 쓰레기인가?’ 혹은 ‘나는 왜 비겁하게 네, 네.’ 하고 굽신거리는 걸까? 이렇게 스스로를 책망하기보다는 나의 그림자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죠.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떠나서 무의식의 층계 밑으로 내려가서 귀 기울여 주는 겁니다. 


왜 이런 감정과 생각이 올라오는 것일까? 귀 기울여주면 ‘아, 그때 그 사람이 나한테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덮어씌우고 오해했었네. 그래서 죽이고 싶을 만큼 열 받았었구나. 이런 공격성은 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네.’ 혹은 ‘아... 말이 안 통하니까 일단 네... 네... 할 수밖에 없었구나. 척을 지면 내가 손해라는 마음이 들어서 네, 네 할 수밖에 없었구나.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막이었네.’ 라는 새로운 해석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죠.


이렇게 무의식의 손을 잡고 충분히 들어주면 분리된 나를 통합할 수 있는 내적 힘 속에서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모입니다. 종전과는 다른 배짱과 지혜가 생겨나고, 이도저도 안 되면 이 판을 떠나 도전할 수 있는 힘도 생기죠.


이렇게 그림자를 건강하게 인식하면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면서도 타인과도 조화를 유지하게 됩니다. 너도 불완전하고, 나도 불완전하니 타인을 이상화 시키거나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게 됩니다. 


융은 아기가 어릴 때는 ‘울음’으로 의사를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울면 엄마가 알아서 젖을 주고 똥을 치워 주니까요. 그러다가 미운 일곱 살이 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합니다. 욕망 그대로 표현하다 보니 어른들에게 혼나기 일쑤죠.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에휴.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니까 혼만 나네.’ 이러고선 착한 아이 페르소나를 쓰게 되죠.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 다시 한번 그림자가 튀어나옵니다. 뇌가 리모델링화되면서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인생 뭐 있어!’ 하고선 있는 그대로 민낯을 드러냅니다. 


그러다 서서히 철이 들면서 ‘아, 이렇게 살다가는 제대로 먹고 살지 못하겠구나.’ 싶어 어른의 페르소나를 씁니다. 그러다가 중년이 되어 다시 한번 페르소나가 벗겨지는데요. 사회적으로 용인된 행동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내 인생은 뭐지? 사는 게 참 재미없구나.’라는 회의가 밀려오는 거죠. 


융은 이러한 공허야말로 그림자가 보내는 ‘새로운 삶’에 대한 프러포즈라고 말합니다. 사는 게 흑백 텔레비전 같고, 허무하고 시시할 때, 억압된 그림자 속에 흐르는 뜨거운 에너지와 만나면 인생 후반전에 대한 전환점이 탄생한다는 거죠. 


인터뷰를 해 보면 인생 2막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분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회사-집, 이렇게 동선이 짧았던 분이 재능 기부를 통해 삶의 면적을 넓히기도 하고, 그간 해 왔던 업무를 자신의 관심사와 접목시켜 창업을 하기도 하고, 새롭게 무언가를 배우고, 창조적인 활동(평소 하고 싶었지만 못한 취미나 활동들)을 통해 한 단계 도약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기를 회피하면 술이나 중독에 빠져서 방황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중년 발달 부분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만큼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겠죠. 


여하튼 요즘 다시 융을 보면서 새삼 느끼는 게 많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내 안의 그림자가 있다면, 그 그림자야말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내적 에너지라는 것, 나를 죽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나를 살게 하기 위한 ‘어둠의 포효’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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